매일신문

[박시윤의 에세이 산책] 봄을 본 적 있나요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폭설이 쏟아졌어요. 가뭄으로 퍼석대던 겨울이 모처럼 차분해지네요. 폭설을 목격한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겨울이라 말하지 않았어요. "봄이 오려는 게야. 암, 봄은 이렇게 오는 게야." 남산동 재개발구역 골목에는 짐승의 발자국도, 사람의 발자국도 선명하게 놓였어요. 아직 떠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발자국들이 말하고 있네요.

하늘이 맑고 햇살이 따습고, 바람이 상쾌하던 어느 날, 우연히 이 골목을 걸었던 적이 있어요.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 이쯤에서 시작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거든요. 길가엔 건물보다 훨씬 키가 큰 은행나무들이 늘어 서 있었지요. 구불텅하게 굽어 도는 길은, 은행나무에 노랗게 물이 들어 초입에서부터 보기가 참 좋았어요. '○○인쇄소'라는 간판이 수없이 보였어요. 문이 열린 곳이 있어 빠끔히 들여다보았죠. 종이 수백, 수천 장이 눈 깜짝할 새 움직이곤 했는데 순식간에 글자가 새겨지고 그림이 옮겨졌죠.

조금 더 깊숙이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분명 늦은 오후임에도 하나같이 문을 열지 않았어요. 집들은 유리창이 깨지거나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고, 길가엔 폐가전들이 놓여 있었죠. 응달진 곳엔 이끼가 자리를 틀었고, 지붕에 올려진 폐타이어들이 눈에 띄었어요. 길엔 온통 은행나무 열매가 수북이 떨어져 불쾌한 냄새가 났어요. 사람은 오간 데 없고 고양이만 득실거렸어요. 폐허처럼 무서웠어요. 담벼락 군데군데 빨간색 X표가 커다랗게 그어져 있었는데 그제야 재개발구역이라는 걸 알았어요. 빨리 벗어나고 싶었어요. 바삐 걸음을 옮기는데 구멍가게 앞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네댓 명의 어르신들이 모여 장기를 두고 있었어요. 모처럼의 인기척이 반가웠죠.

두어 평 남짓한 가게에 들어서니 숨이 막힐 듯 많은 물건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었어요. 곧 떠나야 할 걸 알면서도 언제 누가 와서 뭘 찾을지 몰라 매일 물건을 들인다는 안주인의 말에 물 한 병을 사면서 나는 큰 고마움을 느꼈죠. 나는 곧 철거가 시작될 것이고 머지않아 아파트가 들어선다는데 왜 아직도 남아 있느냐고 물었죠. 40, 50년 몸 뉘이고 살아온 터를 하루아침에 어찌 쉽게 떠날 수 있겠느냐며,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어 집이 뜯기는 마지막 날까지 있겠노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내가 숙연해진 까닭이었어요.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낡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서로 즐거움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해 가을은 아름답게 무르익고 있었죠.

오전 늦게야 폭설이 멎었네요. 창문을 열고 볕을 집안으로 들이는데 바람에서 물 냄새가 나네요. 흙냄새가 나네요. 먼 곳을 보다 시야를 당겼는데 그때 그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남산동 재개발구역. 가을날의 그곳을 나는 왜 그토록 멀리 있다고 느꼈을까요.

얼른 그리로 나가보아요. 어르신들은 보이지 않고 구멍가게도 문을 열지 않았네요. 대신 나무들이 서 있었는데 곧 봄이 오려는지 물이 바짝 올랐네요. 이곳에도 지나간 시간을 거슬러 다시 따뜻한 봄이 올까요.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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