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혁명으로 민주주의 헌법 제정
권력층이 솔선수범한 토지개혁
깨어 있는 시민, 책임 있는 권력
미래 위한 역사에 연대한 사람들
선생님,
덴마크 무혈혁명이 일어난 지 꼭 170년이 되었습니다. 반체제 시위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1848년 3월 21일, 어떤 기록에는 1만2천 명,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1만5천 명의 민중이 왕의 집무처인 크리스티안스보르궁으로 행진했습니다. 분열 없는 자유국가의 민주헌법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민의 다수였던 자영 농민을 중심으로 노동자, 그리고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왕위를 계승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던 프레데릭 7세는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개혁의 시점임을 깨달았고 구질서를 대표하던 각료들의 사퇴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민중 대표가 도착했을 때 그들의 요구를 과감히 수용했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던 시민들은 기쁨에 환호하며 왕을 칭송했습니다.
약 200년의 절대주의 독재 왕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고 민주주의 헌법과 의회를 지닌, 입헌군주제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시위 며칠 후, 덴마크는 독일 접경지역의 쉴레스비히-홀스타인 영지와 3년 전쟁에 돌입합니다. 전쟁을 치르면서도 헌법안을 논의할 대표들이 선출되었고 보수 대표, 중도 정당 대표, 진보 농민 대표 세 그룹이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위가 행해진 지 1년이 지난 1849년 5월 6일, 마침내 역사적인 민주헌법이 수립됩니다.
덴마크는 중세 이후 유혈혁명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1918년 극소수 집단이 러시아 혁명의 자극을 받아 소요를 일으킨 적이 있지만 대중의 지지 없이 사그라졌습니다. 덴마크인들은 농담처럼 말합니다. "덴마크에 왜 유혈혁명이 없었냐고?-늘 비가 와서 시위를 할 수가 있어야지."
무혈혁명이 있기 전 1700년대 중후반, 덴마크는 이미 믿기 어려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토지개혁 내지 농민개혁이었습니다. 개혁 지향의 소수 지주 귀족 계층이 스스로 토지와 소작농에 대한 기득권을 내어놓고 개혁안을 법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수구 지주들이 저항했지만 개혁 귀족은 이슈를 공론화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제도를 성사시켰습니다.
어떻게 이런 토지개혁이 가능했을까요? 학자들은 "당시 유럽의 신문물을 공부한 진보 귀족층은 새로운 시대를 위해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침 이들이 정치권력을 잡고 있었다"라는 다소 허망한 해석을 내어놓습니다. 왕세자 때부터 토지개혁을 지지했던 프레데릭 6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농민들이 왕의 관을 무덤까지 들였다는 대목은 차라리 드라마입니다. 의식 있는 시민과 책임감 있는 권력층이 손잡고 '깨어 있는 사람들의 나라'(The Land of the Living)를 만들었고 오늘날의 복지국가, 혁신주도국가를 이룬 것이겠지요.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겁고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역사에는 이 무렵, 홍경래 난, 진주민란, 동학혁명이 이어졌고 정부는 무력진압으로 맞섰습니다.
힘에 부친 정부는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이는 다시 일본군의 개입을 초래하여 결국 근대화는 실패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좀 더 이성적으로 멀리 보며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넘치게 배운 것 같습니다.
집에서 불과 500m 떨어진 크리스티안스보르궁은 국립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입니다. 지금 이 궁은 국회의사당, 대법원, 총리 관저가 함께 자리한 공무 중심지입니다. 며칠 전, 제가 들렀을 때는 비가 뿌리고 있었습니다.
광장에 멈춰 서서 170년 전 이곳을 채운 민중의 함성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4대 강국의 게임 앞에서 선거와 개헌과 남북관계의 중대 난제를 마주한 우리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최근 읽은 미국학자 보리쉬(Steven M. Borish)의 덴마크 연구저서, '깨어 있는 사람들의 나라'(The Land of the Living)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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