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명절, 서울 대형 병원의 신규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간호사의 꿈에 부풀어 찍었던 병원 이력서 사진은 영정 사진이 되고 말았다. 많은 이들은 '태움' 문화가 한 간호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했다.
'태움'은 선배 간호사가 신규 간호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가하는 정신적, 육체적 괴롭힘을 말한다. '영혼이 재가 되도록 태운다'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명목상 엄격한 교육이지만 신규 간호사에게는 과도한 인격 모독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간호사의 41.4%가 '태움'을 경험했고, 신규 간호사가 사직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태움'이다.
'태움'은 선배 간호사 개인의 인성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병원의 만성적인 간호 인력 부족과 열악한 근무 환경이 '태움'이라는 병폐를 만들어 낸 주범이다. 충분한 임상 교육을 받지 못한 신규 간호사나 과도한 업무에 지친 채 후배 교육까지 도맡아야 하는 선배 간호사 모두 피해자다.
우리나라 간호 인력은 인구 1천 명당 4.8명으로 OECD 국가 평균(9.3명)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간호사들은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린다. 간호사 한 명당 환자 수가 적을수록 더 친절하고 감염률과 사망률이 감소한다는 게 입증되어 있지만, 병원은 인력 대신 돈벌이가 되는 시설과 장비에 투자한다.
환자의 건강을 돌보는 직업이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볼 겨를이 없어 많은 간호사가 위염, 수면 장애, 만성 스트레스 등에 시달린다. 각종 평가, 병원 행사, 심지어 송년회 장기자랑 등 간호와 상관없는 업무에 끝없이 소진된다. 결국 '백의의 천사(天使)'는 '백일의 전사(戰士)'가 된 채 지쳐 병원을 떠나간다.
김나경 감독의 단편영화 '내 차례 My turn'은 간호사의 '임신 순번제'를 다루었다. 영화에서 병원은 여성 인권의 사각지대로 비쳐 충격을 주었다. '임신 순번제' 역시 병원의 인력 부족에 따른 간호사들의 '궁여지책'이다. 인력 공백의 해결은 병원의 몫임에도 임신한 간호사가 죄인이 된다.
자신의 차례가 아닌데 임신한 주인공이 수간호사에게 알리자 '한 명 빠지면 모두 힘들다'며 슬그머니 산부인과 명함을 내민다. "빨리 정리해. 바퀴가 망가지면 자전거가 제대로 못 굴러가는 거야." 선배 간호사의 말에 후배 간호사는 흐느끼며 말한다. "바퀴가 아니라 자전거 전체가 고장 난 거 아닐까요?"
간호사가 제대로 돌봄을 받아야 그 돌봄을 환자에게 베풀 수 있다. 병원은 충분한 간호 인력 확보와 간호사 근무 환경 개선에 나서야 한다. 정부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병원 업무 사이의 틈을 메울 수 있는 체계적인 간호사 교육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세계 간호사의 날'이었던 이달 12일, 수많은 간호사가 비를 맞으며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간호사들의 절규에 이제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바퀴'가 아니라 '자전거'를 고치는 일에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간호사가 행복해야 환자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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