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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빈의 시와 함께] 폐가에 와서 분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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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수(1963~ )

그날 당신은 내게 폐가 한 채 넘겨주고 떠났네

늑골 같은 담벼락에 삐딱하게 기대선 개복숭나무 한 그루

마지막 담밸 빨듯 붉은 꽃들을 뻑뻑 피워대고 있었지

아무 대문이나 불쑥 당신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한 모금씩 낡은 골목의 폐부로 스며드는 분홍

분홍이란 폐가에 와서도 환해질 수 있구나

삭은 기둥이며 서까래며 어두운 구석마다

쿨럭쿨럭 신음들이 새어나올 것 같은데

객지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나는 말이 없어지고

적막보다 깊은 연소를 생각해 보네

살과 뼈가 남아있는 마음을 태워 분홍을 얻네

처음 배운 담배처럼 메케하게 어리는 꽃 그림자

그날 나는 남은 마음을 태우러 갔었네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 (서정시학, 2018)

당신이 떠난 자리엔 '폐가 한 채' 남았구나. 당신을 보낸 나는 '개복숭나무 한 그루'로 환생하여 허물어진 담벼락에 기대선 채,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붉은 꽃'으로 피워낸다. "쿨럭쿨럭 신음이 새어나올" 것 같은 심한 고통과 깊은 적막의 환상통을 앓는 폐가에 머물며 "살과 뼈가 남아있는 마음을 태워" 환한 '분홍'을 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폐가'와 '분홍'은 각각 무엇의 상징일까? 닫히고 어두운 죽음의 공간을 '폐가'라 한다면, 열리고 환한 재생의 불꽃이 '분홍'이다. 실연으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자아의 심리적 공황 상태를 '폐가'라 일컫는다면, 그것의 미적 승화를 상징하는 것이 '분홍'이다. 금연으로 고통을 겪는 자아의 금단 현상을 '폐가'라 한다면,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어렵사리 극복해낸 것이 '분홍'이다. 오호, 실연의 슬픔과 금연의 고통을 서로 의탁한 실연의 노래이자, 금연의 노래여! 온몸 불살라 '분홍'을 누리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의 노래이자, 생명 부활의 노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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