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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윤의 에세이 산책]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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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골목 초입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떠안은 골목 속에서 하루는 말없이 저문다. 길모퉁이에 집결된 쓰레기 더미에서 숨죽이며 먹잇감을 찾는 도둑고양이처럼, 나는 소리 없는 걸음으로 집으로 간다. 막노동과 시장판에서 하루 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고, 기초수급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노령의 어르신들이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는 이 골목은 도심에서 소외된 지 오래인 듯하다.

무너지지 못해 마지막까지 뼈대를 곧추세운 집들이 하나, 둘 비워지고 있다. 수년 전부터 재개발 바람이 불었고 부동산업자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언제부턴가 미등조차 켜지지 않는 집들이 늘었다. 왁자했던 골목은 한낮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유난히 어둠이 빨리 내렸다. 시대를 같이했던 큰길 건너 집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다음은 우리 차례가 될 것이라며 골목 사람들은 말한다.

드물게 서 있는 가로등 아래 올해로 구순을 맞은 할머니가 서 계신다. 빈속에 급히 먹은 찬밥 덩이가 당최 내려가지 않는다며 나를 불러 세우신다. 나는 얼른 대로변에 있는 약국으로 달려가 소화제를 산다. 약을 받아든 할머니는 잠시만 들렀다 가라며 나를 집 안으로 이끄신다. 소화제는 구석에 밀쳐두고 삐거덕대는 서랍을 열어 오래된 공책 하나를 꺼내 펼치신다. '미국석이' 외국에 나가 있는 작은아들네에 전화를 넣어달라는 뜻이다. 할머니는 글을 모르신다. 그러나 이 땅과 저 먼 땅의 시차는 젊은 나보다 더 잘 꿰고 계시며, 그곳으로 보내는 된장'고추장의 항공료가 ㎏당 얼마나 나가는지도 훤히 꿰고 계신다.

할머니 집은 낡고 오래되어 불편하기 그지없다. 며칠째 고장이 나 작동하지 않는 보일러를 탓하며 일삼아 아랫목을 만지작거리신다. 한국전쟁 이후 몇 가구가 한데 모여 살 만큼 너른 마당을 가졌었다는 할머니의 집은 세월이 흐르면서 동과 서로, 남과 북으로 쪼개지고 쪼개져 지금은 겨우 열 평 남짓 남겨졌다.

집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집을 닮아서, 살 만큼 살고 나면 흔적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리라. 집이 사라진 곳에 누군가가 들어와 또 자신을 닮은 집을 지을 것이고, 오래오래 주인이 되어 제 몸 누이고 서로가 서로를 닮아 갈 것이다. 한참 통화를 끝낸 후에야 할머니의 안색이 환해지신다. "할머니, 집이 많이 차요." 아무리 누추해 보여도 내 집만큼 편한 곳도 없다며 꽃무늬가 수놓인 요대기 위에 몸을 누이신다. 오늘밤은 바람이 아무리 요란하게 불어도 구순의 할머니 깊은 잠 주무실 수 있겠다.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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