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김종필의 세컨드 샷

예전부터 정치와 골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통했는데,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1989년 안양CC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회동했다. 3당 합당을 위한 회동의 일환이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YS가 1번 티샷을 하기 전에 자신감 있게 연습 스윙을 세 차례 했다. 공을 티에 올려놓은 YS가 힘껏 스윙했지만, 웬걸 헛스윙이었다. 너무 세게 휘둘렀는지 엉덩방아까지 찧었다.<안문석의 '대통령과 골프'>

골프 전문가들이 헛스윙하는 아마추어는 자주 봤어도, 엉덩방아 찧는 것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희귀한 장면이었다. 김종필은 드라이버를 든 채 껄껄 웃었다. 자존심 센 YS는 정치적 라이벌인 JP 앞에서 망신을 당한 탓인지 그날 이후로 골프를 끊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골프금지령'까지 내렸다. 원래 YS는 110타를 쳤고, 골프에 재능이 없는 편이었다.

반면 김종필 전 총리만큼 골프에 관해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이도 드물었다. '김종필 스윙' '김종필 스코어 카드' '골프 2인자'가 회자할 정도로 '골프광'이었다. '김종필 스윙'은 폼이 엉성하고 팔로만 치지만, 공은 정확하게 맞는다는 말이다. 한국의 주말 골퍼들이 파4홀에서 4타를 치면 스코어 카드에 4로 적지 않고 0으로 적는 것은 김 전 총리가 처음 시작했다. 타수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다.

김 전 총리는 세컨드 샷만큼은 일품이었다. 한창때에도 드라이버 비거리는 최대 200야드(182.8m)에 불과했지만, 3번 우드로 세컨드 샷을 치면 온그린하거나 그린 근처에 떨어졌다. 두 번째 공만 잘 치는 점을 빗대 '평생 2인자'라는 농담이 따라다녔다. 한때 완벽한 싱글이었고, 80세 넘어서도 80대 초반을 쳤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도 3년 전까지 특수카트에 기대 한 손으로 골프를 치기도 했으니 골프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와 라운딩을 하거나 대화를 나눈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편안하고 재미있었다'고 했다. 유머 감각에 박학다식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만큼 이상적인 대화 상대였다.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고, 인간적인 매력과 낭만을 가진 노정객이 세상을 떠났으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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