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딜리트/김유열 지음/쌤 앤 파커스 펴냄.

딜리트
딜리트

'인간의 마음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진공(眞空)을 싫어하며, (장면이 비어 있으면)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무슨 정보든 채우려 한다.' -56쪽-

가령, 의자 아래 드러난 고양이 꼬리를 보고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양이 몸통 전체를 상상하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제는 새롭고 혁신적인 생각을 어떻게 마음속에 집어넣느냐가 아니다. 그보다 오래된 생각들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마음은 낡은 가구로 가득 차 있는 건물이다. 마음의 한구석을 비워라. 그러면 창의성이 즉시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고 말한다. 책 제목 '딜리트(delete; 삭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현재 있는 것을 삭제하면, 새로운 무엇이 자동으로 창조된다는 것이다.

◇ 10년간 EBS 시청률 600% 상승

EBS PD인 지은이는 '딜리트'를 통해 10년 동안 EBS 시청률 600% 상승을 이끌었다. 그의 전략은 간단했다. 잘할 수 없는 것은 비우고,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EBS 본질에 맞지 않는 프로그램을 모두 딜리트하고, 어린이와 다큐로 프로그램을 단순화시킨 것이다. 프라임 타임에도 EBS에서는 다큐멘터리 방송이 나오게 함으로써 교양과 다큐를 사랑하는 시청자는 언제든지 EBS에서 다큐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은이는 "모든 언론이 천문학적 제작비를 들여 지구촌을 연결하는 휘황찬란한 디지털 판타지로 달려가는 사이, EBS는 인류의 원형질로 파고들었다. 편당 320만 원의 제작비로 인류의 원형질에 잠재된 불멸의 DNA를 깨웠다."고 말한다.

◇ 막막하기만 한 창조·개혁·혁신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창조, 혁신, 개척, 개혁을 요구한다. 상큼하고 좋은 말이지만, 그 말을 듣는 우리는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지은이는 "딜리트만 잘해도 누구나 창조자, 혁신가, 개척자, 개혁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창조하라. 개혁하라"고 하면 막막해지지만 "딜리트하라!"고 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이 전하는 딜리트의 기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有)를 무(無)로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시대에는 창조라는 말이 창조를 억압한다." 며 "딜리트의 기술은 누구나 창조자로 만든다. 훈련받은 특정 엘리트나 천재만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딜리트 기술에 익숙해지면 나처럼 평범한 PD도 창의적인 기획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 무엇을, 어디를 딜리트할 것인가

우리는 대체로 익숙한 것,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선호한다. PD는 PD처럼 생각하고 작가는 작가처럼 생각하고,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어머니는 어머니처럼 생각한다. 정교한 규정과 공간이 사람을 통제하므로 생각도 거기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그 결과 발전은 더디고, 때때로 도태하기도 한다.

이 책은 '딜리트는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딜리트하고 파괴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무언가를 해야 한다. 일부러 딜리트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보이기 마련이다.'고 말한다.

전선과 먼지봉투가 없는 다이슨 청소기.
전선과 먼지봉투가 없는 다이슨 청소기.

그렇다면 무엇을 딜리트할 것인가. 이 책은 "무엇이든 딜리트하면 새로운 것이 창조 된다. 딜리트 대상은 구체적 사물일 수도 있고, 추상적인 개념일 수도 있고, 무형일 수 있고 유형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경계와 영역, 기능과 용도, 재질과 모양, 컬러, 콘셉트와 스타일도 딜리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원근법을 버렸고, 샤넬은 장식을 걷어내고 치마를 잘랐다. 제임스 다이슨(영국 기업인·다이슨 대표이사)은 선풍기 날개를 없앴고,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는 동물쇼를 없앴다. 오드리 헵번은 풀 세팅 후 마지막에 장신구 한두 개를 반드시 떼어냈고, 프랑스 파리의 유명 빵집인 푸알란 빵집은 제빵사를 없앴고, 낙소스(홍콩에 본거지를 둔 다국적 음반사)는 클래식 음반에서 스타를 없앴다. 말보로는 여성용 담배라는 초기 콘셉트를 버렸다. 어느 분야, 어느 공간에서나 딜리트가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피카소는 "한 점의 그림은 대개 덧셈의 총액인데, 내 그림은 파괴의 총액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회화의 철칙 같았던 '원근법'을 무시해버렸는데, 원근법을 딜리트하자 그 자리에서 '입체주의'가 탄생했다.

피카소는 회화의 철칙 같았던
피카소는 회화의 철칙 같았던 '원근법'을 무시해버렸는데, 원근법을 딜리트하자 그 자리에서 '입체주의'가 탄생했다. 사진은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

◇ 제약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 발휘

딜리트가 창조의 어머니이듯 집중도 창조의 동기를 제공한다. 제약이 오히려 궁극의 미(美)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일본 에도시대(1603년~1867)의 사회 지배층은 사무라이였다. 그러나 에도시대 후반이 되자 상인의 힘이 막강해졌다. 오랫동안 전쟁이 없으니 상업이 발달해 상인들이 부를 축적한 것이다. 가난한 사무라이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썼고 그 때문에 그들에게 휘둘리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일본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확고했다. 최상층인 사무라이들은 상인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상인들에게 '사치금지령'을 내렸다. 화투, 불꽃놀이 같은 오락을 금지하고, 기모노의 소재나 무늬, 색상도 철저하게 규제했다. 상인의 기모노에 사용할 수 있는 색을 갈색, 회색, 남색 3가지로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제약은 오히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단초가 됐고, 새로운 창조로 이어졌다. 옷감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냥 갈색이 아니라 진한 갈색, 연한 갈색, 은은한 갈색, 빛나는 갈색 등으로 옷감의 색을 발전시켰다. 하나의 갈색이 다양한 갈색으로 더욱 풍부하게 탄생한 것이다. 물론 갈색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법 위반이 아니었다.

책은 총 4부 20장으로 구성돼 있다. 지은이는 책 말미에 "천하의 대세는 세세한 것에서 비롯된다. 세세한 것에서부터 딜러터가 되어 보시라. 작은 것이니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작은 것이라고 시시하게 보면 안된다"며 딜리터가 되어볼 것을 강권한다.

▷ 지은이 김유열

콘텐츠 기획자이자. EBS PD. EBS의 대표 프로그램인 '다큐프라임', '세계테마기행', '한국기행', '극한직업' 등을 기획했다.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 '중용, 인간의 맛'을 비롯해 박재희의 '손자병법과 21세기', 성태용의 '주역과 21세기' 등을 기획해 대한민국에 인문학 열풍을 불러왔다. 국내 최초의 3D 입체 다큐멘터리 '신들의 땅, 앙코르', '위대한 바빌론'을 연출했다. 100만 관객을 감동시킨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역시 그가 기획한 작품이다.

407쪽,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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