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 '어느 낙엽의 시']①박영귀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별명이 '해골'인 굶주려 뼈만 남은 아이가 병역 기피자가 되고 육군 일등병이 되었다가 해병대 대위가 되었고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노동자의 지도자로 온 힘을 다하다 미국으로 와서 정신병 진단을 받았으나 그것을 극복하여 미국 연방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고 긴 타국 생활로 잃어버린 조국의 언어를 찾기 위해 한글을 배우며 작가의 꿈을 꾸는 흘러간 굴곡의 이야기.

그때 흘리던 눈물은 지금도 흘릴 수 있는데 한번 떠난 잎은 다시 그 자리에 올 수 없는 나는 낙엽입니다.

살 만하니 병들고 다시 고국에 돌아가 살 수 없는 처지의 썩은 낙엽입니다. 고국을 떠난 지 40년 가까이 국적 포기를 안 한 이중 국적자입니다. 그것은 저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중학교는 굶어, 결석을 밥 먹듯이 해서 겨우 졸업을 했고 고등학교는 고1 때부터 취직 반에 들어 고2(?) 때는 민중서관 활판부 수습생으로, 고3(?) 때는 취직 생활을 위한 연습, 졸업 후 K 서적에 입사하여 직장인이 됐습니다.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어 S 대 입시를 봤는데 수학 문제가 6문제인가, 7문제인가 나왔는데 5-6문제는 전혀 알 수가 없었고, 나머지 한 문제도 아리송해 도중에 시험장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종로 학원가에서 수학을 중점적으로 공부를 하고 통금 사이렌 직전에 집에 왔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입시에 또 낙방, 안 되겠다 싶어 다음에는 다른 과를 지원하기로 하고 취직이 쉽다는 후기 대학인 S 대에 입학, 몇 개월 다니다가 저는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저의 별명은 해골, 또는 왕 눈깔이었습니다.어릴 때 너무 굶주려 바짝 말라서 눈만 크게 보이다 보니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런데도 직장과 학교나 학원에 잠을 뺏겨 수면 부족으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입영통지서까지 나왔습니다.

저의 학력은 이것까지 입니다. 그래서 배운 것이 많지 않아 이국 생활 40년, 영어도, 한글도 제대로 못 하는 반벙어리입니다.

삼랑진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온 부모님께서는 영등포 꿀꿀이 죽을 파는 시장 부근에 자리를 잡으셨다. 나는 영등포 영중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했고 얼마 후 동쪽에 사는 학생은 (소문에) 영동초등학교로 (나중에는 남쪽에 사는 학생은 영남초등학교로) 재편성하여 나는 3학년 때에 영동초등학교로 다니게 됐다. 교실은 천막이었다.

이(기생충)들이 너무 많아, 특히 여자아이들 머리에는 하얀 것들이 기어 다녔고 서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털실로 짠 옷이나 장갑에는 쌀알만 한 이들이 박혀 있었다.

남자아이들 머리나 몸에는, 기계 총, 도장 부스럼이라는 피부병이 많았다. 학교에서는 DDT 살충제를 주어 그것을 조그만 주머니에 넣어 상의 겨드랑에 달게 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목욕이나 빨래를 할 여건이 안되어 목욕은 일 년에 한 번 설날 전에 할까 말까 였고 빨래도 자주 할 형편이 안되어 이가 들끓었다. 특히 서캐는 일일이 잡을 수 없어 촛불에 그슬리면 따따따 인민군 따발총 소리를 냈고 추운 겨울에는 얼어 죽으라고 옷가지들을 밖에 내 걸었다.

우리 가족들도 미군 부대 식당 쓰레기통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를 끓여 파는 꿀꿀이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나 꿀꿀이 죽은 돈 주고 사 먹어야 하므로 부담이 가서 자주 먹지는 못 했다. 담배꽁초도 들어있고 동전, 깡통 뚜껑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코 푼 휴지도, 가래침도 있다고 했으나 그때는 그것을 따질 형편이 못 되었고 오히려 그런 것이라도 있는 게 다행으로 여겼다. 운이 좋으면 칠면조 고기도, 햄, 소시지 조각도 먹을 수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왕건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께서는 신기하게도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미군 물자인 페인트, 잡화 등을 파셨는데 장사가 잘되는지 가게를 차리셨고 "자고 먹을 것만 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아저씨를 점원으로 두셨다. 가게 안에 군용 목침대에서는 아저씨가 주무시고 가게 뒤엔 우리 가족이 살았는데

어느 봄날, 가게를 아저씨에게 맡기고 우리 가족은 창경궁 벚꽃 구경을 갔다 왔는데 집과 가게가 불에 타서 재만 남아 있었다.

외상으로 가져온 물건들이 많았다고 했고, 더욱이 아저씨가 안 보여 아버지께서는 "내가 김 씨를 죽였다"고 통곡을 하셨다. "그렇게 착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만 구경하러 갔다"고 어머님께서도 우셨다. 부모님께서는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김 씨 아저씨를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화재로 빚을 잔뜩 지고 갈 곳이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종이상자와 군용 천막 천으로 잠자리를 만드셨고 술과 담배를 못 하셨던 분이 술과 담배를 시작하셨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매일 우셨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저씨 혼령을 볼 낯이 없다고 이사를 했다. 전 해군 본부와 장훈 중, 고교가 있기 전 신길동 고갯마루 공동묘지를 옆으로 한 판자촌에 있는 아는 이의 헛간을 빌려 보금자리를 만들었지만, 빚쟁이들이 아우성치는 난장판의 나날이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아예 방 한구석에 살림을 차렸다. 돈을 받기 전에는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중학교 입시가 내일 모레인데 공부는 무슨 공부인가? 밖으로 겉돌았다.

메뚜기, 도마뱀을 잡으러 다녔고 남의 밭 고구마, 무를 캐 먹고 관악산, (서울 대학교가 생기기 전) 검지산(산 이름)부근의 절과 기도원 근처에서 칡뿌리를 캐다가 젊은 스님, 박수무당에게 얻어 맞았다.

다행히 봉천, 사자암, 신림, 난곡, 고개에는 (달동네가 생기기 전) 서낭당이 있어 북어, 하얀 쌀밥 (잿밥), 과일, 어떤 날은 고기산적, 돈도 있었다. 그것들은 나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운이 좋아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기운이 없어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결석을 하자 반장과 담임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셨다. 이틀을 먹지 못해 송장처럼 널브러진 우리 가족을 봤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교우 돕기 쌀 한 줌씩 가져오기 운동을 벌여 김익주 담임 선생님은 몇 명의 급우들과 쌀 봉지를 들고 집에 오셨다.

(6월4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어느 낙엽의 시' 2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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