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이두산(본명 이현수·1896~미상)은 '광복군 행진곡' '선봉대가'라는 군가의 작사자이자 작곡가이다. 그는 계성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 서기에 임명되었고,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약 6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20년 8월 친일 관리·부호들에게 보낼 경고문과 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문서 등을 휴대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이를 배포하였다. 또한 그는 워싱턴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자 외국인 선교사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고, 「자유」를 발간하여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등에 배부하였으며,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금산 지역의 자산가들을 겁박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이두산은 경북경찰부에 자수하여 복역하던 도중에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1928년 1월 즈음 중국 하문으로 옮겨가 인삼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는 1930년 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 성격인 한국독립당의 광동지부에 들어가서 「한성」(韓聲)이라는 기관지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킬 논설들을 여러 차례 기고하였다. 그러나 이두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경쟁 관계에 놓였던, 의열단 계열의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이후에 「동방전우」와 「조선의용대통신」을 발행하며 항일의식을 드높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본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면서, 이두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부 차장, 내무부 차장, 정훈처장을 차례로 맡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하였다. 이두산은 해방 정국에서 조선대중당을 결성하였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다가 6.25전쟁 중에 종적을 감추었다.
현재 이두산의 생가 터(달성군 화원읍 명곡로22길 18)에는 그의 삶을 조명한 표지판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문필가로서 일본에 항거했던 이두산의 업적과 정신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서는 그의 생가 터 주변에 그를 추모할 기념비를 제막하는 것이 시급할 것이다.
대구 영남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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