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이병철 동상을 보면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기업의 존립 기반은 국가이며 따라서 기업은 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지난 40년간 사업보국을 주창해왔다.' '호암 이병철 선생은…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철학을 가진 선구자로 모든 경제인의 귀감이다.'

대구의 옛 제일모직 터에는 삼성의 기업 왕국을 세운 이병철 전 회장의 동상이 있다. 동상 뒤 벽 양쪽에는 그의 생전 업적의 글을 새겨 놓았다. 앞은 1982년 4월 2일 미국 보스턴대학 박사학위 기념강연에서 따온 말이고, 뒤는 2010년 2월 12일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그를 기려 적은 글이다.

나라가 망한 1910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일으켜 시작된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 삼성의 모태'가 대구임을 밝히고, '국가 민족 그리고 인류에 대하여 봉사'를 꿈꾼 그의 생각을 세상에 드러낸 현장의 증언이다. 삼성의 발상지인 대구로서는 당시 시민 뜻을 모아 동상을 세워 기릴 만했다.

옛날과 달리 삼성으로는 세월이 흘러 대구의 효용 가치가 떨어지고 1세대 창업주를 지나 2세대 후계를 거쳐 3세대 손자 경영으로 바뀐 만큼 대구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은 물론 삼성 기업군의 발상지로서의 자긍심 같은 느낌도 옅을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렇더라도 대구로서는 남다르기에 동상으로 기렸을 법하다.

그의 동상과 그를 읊은 글을 읽고 최근 노조와 관련된 재판부의 삼성에 대한 단죄(斷罪)를 보면 그가 생각한 '사업보국' 뒤에 가려진 숱한 일반 국민의 성원과 근로자의 피와 땀, 눈물을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삼성은 자본이 부족하던 시절, 고사리손으로 모은 코 묻은 용돈부터 의무적인 학생 저축 장려 등으로 쌓인 돈을 썼을 터이다. 또한 직원들은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그와 함께 일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동상 뒤 글 어디에도 이런 사연은 엿보이지 않는다. 그를 돋보이게 하는 곳인 만큼 어쩔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지난 2013년 당시 정의당 심상정 국회의원 폭로에 따른 삼성의 노조 와해 의혹에 대한 지난 17일 재판부의 '노조에 대한 반헌법적 태도' 판결은 그의 경영 철학을 되돌아보게 한다. 해고된 삼성 근로자가 서울의 철탑 위와 밑에서 농성하는 모습이 겹치는 요즘, 그의 동상과 글귀가 이리도 달리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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