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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의 북돋움] 열 살의 라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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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그림책 칼럼니스트
김은아 그림책 칼럼니스트

열 살 조카한테서 '라떼'라는 말이 나왔다. "라떼는 말이야~"는 '나 때는 말이야'를 비슷한 발음으로 빗댄 말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허세 섞인 무용담을 들려줄 때 꺼내는 말로 자신의 경험이 전부인 것처럼 충고와 지적을 서슴지 않는 꼰대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들이 특히나 싫어한다. 그런데 정작 젊은이들도, 열 살 아이도 '라떼'를 사용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남동생에게는 열 살, 여섯 살 아들이 있는데 둘의 기질이 매우 다르다. 첫째는 과묵하고 점잖은 반면, 둘째는 애교가 많고 에너지가 넘친다. 어버이날을 맞아 오랜만에 친정에서 가족이 모였다. 엄마 품을 파고든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 서운함이 복합적으로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첫째 조카는 뭐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아빠・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형아가 그랬어" 하고 이르며 서럽게 울기까지 하는 동생이 얼마나 얄미울까? 뭔가 내세울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어느 날은 "나는 여섯 살 때 말이야. 책을 혼자 다 읽었어. 너는 아직 글자 못 읽지?" 그러고는 홱 돌아서 가더라는데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난다.

대학교 2학년인 다른 조카도 여섯 살 아래인 남동생한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너 나이 때는 말이야, 뭐든 잘 먹었어. 그러니까 야채 골라낼 생각하지 말고 다 먹어. 알았어?" 편식이 심한 동생을 나무라는 누나식 '라떼' 화법이다. 첫째 조카는 너그럽기만 한 엄마를 대신해서 자기가 동생의 밥상머리 교육을 시켰다며 자부심 섞인 자랑을 곧잘 한다.

형제끼리, 남매끼리 싸우면서도 챙길 건 챙기고 한 명이 어디 가고 없으면 애타게 찾는 모습이 귀엽다. 조카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싶은 고모이자 이모로서 경제적 지원은 물론이고 그들의 성장과 일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조카들이 예쁘기도 하지만 언니와 남동생에 대한 고마움이 더 깊이 깔려 있다.

언니는 바쁜 아버지・엄마를 대신해서 일찍부터 두 동생을 돌봤는데 도시로 나와 셋이 자취를 하면서부터는 점심 도시락 싸기와 밥, 청소, 빨래를 도맡아 했다. 그런데도 빈둥빈둥 노는 동생들한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라떼'를 운운하며 그때의 수고를 생색낸 적이 없다.

학부모 교육이나 도서관 평생교육 강좌에서 만난 할아버지・할머니가 곧잘 부탁해 오는 일이 있는데 동생을 시기하는 손주들에게 읽어 줄 그림책을 추천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때' 얘기를 꺼내신다. 우리 때는 누나가 동생을 업어 키웠는데 요즘 애들은 자기밖에 모르니 커서 형제 귀한 줄이나 알겠냐며 걱정 섞인 말씀을 하신다.

형제간의 우애는 각자 타고난 기질, 부모의 교육과 본보기, 시간의 흐름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결정체이다. 그림책으로 형제애를 가르칠 수는 있어도 진심이 담긴 실천은 각자의 몫인 것 같다. 주위에서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는 형제들을 많이 본다. 모두 어른인데 말이다. 학교 다닐 때 형제간의 우애를 못 배워서, 책을 안 봐서 그렇게 지내는 건 아닐 테다.

어쨌거나 '의좋은 형제'(국민서관)와 같은 그림책은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을걷이를 끝낸 후 형과 아우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밤중 상대방의 벼 낟가리에 볏단을 가져다 놓는 이야기가 구수하다. 아무리 갖다 날라도 자신의 볏단 수가 줄어들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던 형제는 농로 한중간에서 딱 마주친다. "이게 누구냐?" "아이고 형님!" "그랬었구나!" "그랬었군요." 다섯 글자로 이뤄진 짧은 대화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그림책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살았던 이성만・이순 형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이들은 부모를 정성껏 모셨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집을 오가며 아침밥과 저녁밥을 먹었으며,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함께 있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형제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들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형제 사이가 너무 좋은 남자랑 살면 인생 피곤해." 그 말에 할아버지들은 '허허' 웃으시기만 한다. 시대가 변해도 형제애는 존재하고 '라떼' 화법도 세대를 막론하고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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