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 세력이 예루살렘과 소아시아를 점령하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기독교 성지를 탈환하자며 십자군을 소환했다. 순례자의 안전보장이 명분이었으나, 동방정교회를 다시 통합하여 기독교의 수장이 되고자 한 교황의 뜻도 있었다. 서유럽 국가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고, 이후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이어졌다.
십자군은 죄를 사면받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천국으로 승천할 것이라 믿었고, 귀족들도 명예와 이익을 위해 참전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때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잠시 동지중해 연안에 4개의 십자군 국가들을 건립했으나 원정은 결국 실패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소년십자군'은 소년과 십자군이라는 두 거룩한 요소가 결합되어 오랫동안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소년십자군 이야기는 니콜라스의 행진과 에티엔의 편지 전달 사건이다. 1212년 독일 쾰른의 소년 니콜라스는 성지를 회복하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며 팔레스타인을 향한 행진을 시작한다. 자신이 남쪽에 도달하면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는 주장에, 아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군중들이 동조한 것이다.
당시 연이은 십자군의 실패에 실망한 민중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참여자들의 최종 운명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교황을 만났다고도 하나, 대부분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과정에서 사망자도 많았다. 일부 소년들은 상인에게 속아 노예로 팔려갔다고 했고, 화가 난 사람들은 니콜라스의 부모를 붙잡아 교수형에 처했다.
같은 해 프랑스 방돔에서 12세 양치기 소년 에티엔의 행진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순례자 모습의 예수가 나타나 프랑스 왕에게 전하라고 편지를 주었다며 프랑스어로 쓰인 편지를 들고 나타났다. 이를 믿은 많은 아이들이 편지 전달 행진에 동참했다. 왕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3만 명의 아이들은 남쪽으로 출발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행렬을 응원했다. 그러나 도중에 많은 사망자가 생겼고,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한 행렬도 바다가 갈라지며 육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자 실망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상인들이 나타나 아이들을 일곱 척의 배에 태워 팔레스타인 성지로 가자며 출항했다. 그러나 두 척은 난파되었고 나머지도 북아프리카 항구에 도착한 후 노예 상인들에게 넘겨졌다고 한다.
소년십자군에 관한 동시대의 기록은 없고, 후세 작가들의 글에서만 전해진다. 성당의 종에도 새겨졌다. 그러나 교황청도 이들을 십자군으로 공인한 적이 없다. 대부분 전쟁과 영주의 폭정으로 토지를 잃고 유랑하던 농민과 아이들의 비무장 행진이고, 기존 십자군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불만이 담긴 전설이 종교와 사회적 목적으로 재가공된 것이다.
누가 이들을 띄운 것인가? 실제 교황이 "아이들도 나서는데"라며 이들을 언급하자, 교황 중심의 5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지기도 한다. 나는 정치적 시위에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참여한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보며 이 이야기를 떠올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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