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어여쁜 여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그가 다 성장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를 명창, 국창이라고 했습니다.…젊은 시절 판소리 스타로 활약하며 얻은 수입을 선산 한중석(韓仲錫) 독립투사에게 독립자금으로 지원한 바 있습니다."
지난 10일 경북 구미시 선산읍의 한 네거리에는 박녹주 명창과 한중석 독립투사에 얽힌 사연을 새긴 작은 표석이 생겼다. '박녹주 명창의 판소리 업적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표석이 세워진 이날은 마침 한중석 독립투사가 1978년 숨을 거둔 지 43주기를 맞는 날이었다.
1979년 삶을 마칠 때까지 국악 판소리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박녹주는 경북 선산이 낳은 국악 명인이다. 반면 1909년생인 한중석 항일투사는 서훈을 받지 못한 탓인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젊은 시절 국악인, 특히 판소리 명창으로 유명한 박녹주가 같은 고향 출신 후배인 항일투사에게 몰래 군자금을 전달해 준 사연이 표석에 새겨졌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박 명창의 독립군자금 제공 사실은 한중석 투사의 아들인 한명수(68) 영남항일독립투사유족회장이 생전 부친으로부터 듣곤 했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 만큼 같은 고향 선산 출신 두 사람의 일제 암흑기 군자금으로 맺은 사연이 남다르게 와닿는다.
게다가 박 명창은 1978년 5월, 고향 선산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고, 이날 공연장을 찾은 옛 투사의 손을 잡고 옛날 더 많은 군자금을 주지 못한 데 대해 미안함을 전달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그게 마지막 인사였던 셈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박 명창이 숨을 거두면서 두 사람은 한 해 사이로 각각 불귀(不歸)의 길을 떠났으니 말이다. 1978년의 5월 고향 선산에서의 공연 만남이 이승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공연 당시 20대 청년으로 아버지를 따라 박 명창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며 두 사람의 대화,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들은 군자금 증언을 고이 간직했던 한 회장으로부터 두 사람에 얽힌 옛 사연을 들은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한 회장 등과 힘을 모아 세운 표석 소식으로 역사 속 독립운동 자산이 숱한 경북에 또 하나의 값진 이야기를 보탤 수 있게 됐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까.
정인열 논설위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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