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기착지

임수현 시인
임수현 시인

뉴스를 보다 보면 '신은 없는 게 분명하구나!' 느낄 때가 있다. 신이 아파서 쉬거나 만사 귀찮아 잠수를 탄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일이 벌어질까. 의류수거함 속에 탯줄 잘린 신생아가 발견되거나 길러준 조모를 살해하는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이니까 사람이라서 세상에는 수많은 '그럴 수도'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신은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래전 부산에서 대구로 오는 기차 안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분이 자신은 입양단체 직원이며 안고 있는 아기는 입양아라는 말을 했을 때 그 놀라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아기를 내려다보며 물기 없이 내뱉던 말 '입양아'.

'아기야 너 지금 잘 때가 아니야. 큰 소리로 울며 보채란 말이야. 저 사람이 널 아주 먼 곳으로 보내려고 해.' 흔들어 깨워 안고 내리지도 못할 거면서 내 안에 수없이 많은 말을 했던 날. 나는 아기를 끝내 깨우지도, 안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아기가 남겨진 차창을 바라보며 동대구역에서 내렸다.

아기는 다음 날 처음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로 갔을 것이다. '부디 양부모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길. 그리고 널 버린 부모를 원망하길. 다시는 이곳으로 너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 돌아오지 않길.' 어린 마음에 빌고 빌었다.

어쩌면 그날 아기는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서울로, 다시 미국의 캔자스로 가기 위해 내 옆자리에 잠시 들렀을지도 모른다. 지금쯤 그 아기는 성년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를 찾아 동대구를 거쳐 부산에 다녀갔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아기가 잊히지 않는 건 나도 이곳이 잠시 들렀다 가는 기착지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은하계 밖에는 행성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르트 구름은 태양계의 껍질을 감싸고 있는 얼음 구름으로 너무 아득한 곳에 있어 그 크기와 상태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행성들의 고향인 오르트 구름을 통과하면 다른 은하계로 진입한다고. 임무를 마친 보이저호가 이 오르트 구름을 통과해 다른 은하계로 가고 있다고 한다. 지구를 포함한 은하계에서 차원이 다른 은하계를 떠도는 보이저호의 외로움은 깊고도 아득해 마음의 가늠이 어렵다.

인간은 은하계의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탯줄 잘린 아기가 버려지고, 싸우고 미워한다. 그걸 보이저호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겠지. 언젠가 다시 오르트 구름으로 돌아가게 될 우리. 겨울을 나기 위해 고니 떼가 낙동강변에 잠시 내려서는 것처럼. 우리도 여기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면 신이 있건 없건 모든 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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