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구애 거절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나

김상범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24일 오전 스토킹 살인사건 현장인 서울 중구 신당역 여성 화장실을 찾아 입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서 조문 뒤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상범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24일 오전 스토킹 살인사건 현장인 서울 중구 신당역 여성 화장실을 찾아 입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서 조문 뒤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두진 논설위원
조두진 논설위원

'신당역 여성 역무원 피살' 사건에서 보듯 우리나라 여성들은 일상에서 남성들은 대체로 의식하지 않는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스토킹 사건'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다. 직장과 집, 인적 뜸한 곳과 사람 왕래가 많은 큰길을 가리지 않는다. '스토킹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 평소 폭력 성향이 강하거나 악한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불안감은 더하다.

헤어지자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만남을 요구하는 사례, 구애를 거절해 모욕감을 주었다고 살해한 사건, 헤어지자는 연인을 납치 폭행하는 사건, 수개월에 걸쳐 전화와 문자로 협박을 일삼는 사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감금하고 폭행하는 사건, 이혼한 전처를 찾아가 살해한 사건, 연인이 변심했다고 그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 등 끝이 없다.

112에 스토킹으로 신고된 사건이 2020년 4천515건, 2021년 1만4천509건, 올해 7월까지 1만6천571건이다. 현재 경찰이 수사 중이거나 불송치를 결정한 스토킹 사건은 2천 건이 넘는다. 피해자와 합의나 고소 취하로 사건화되지 않은 숫자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스토킹 처벌법'은 1999년 처음 발의됐지만 20년 넘도록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2021년 3월 국회를 통과, 2021년 10월 21일에야 시행됐다.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면 요란을 떨다가도 한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넘어가 버린 것이다. '스토킹'을 범죄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 약하니 가해자들도 스토킹을 범죄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현행법상 스토킹은 반의사불벌죄여서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거나 합의해 주면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면 처벌받지 않기에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더욱 못살게 협박한다. 협박에 질려 피해자가 합의해 주고 사건이 무마되면 가해자는 또 스토킹을 재개한다. 견디다 못한 피해자가 더 이상 합의해 주지 않으면 더 큰 범죄로 이어지는 식이다. 이런 틈을 막자면 스토킹 범죄에 대한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미 발생한 사건, 점점 더 흉포해질 가능성이 높은 사건에 대해 수사기관이 개입해 조치를 취할 수 있고, 구속영장을 청구할 근거도 생긴다.

가해자에 대해 무죄 추정과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는 만큼 피해자에 대한 신변 보호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스마트워치만으로는 작정하고 달려드는 가해자를 막기 어렵다. 신변 보호를 받던 여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올해에도 몇 건 있었다. 나아가 감시 대상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전환해야 한다.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시 위치 추적 장치 부착, 가해자의 활동 반경 제한, 가해자가 일정한 거리 안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할 경우 피해자 휴대폰 등에 자동 알림, 경찰의 즉각 대응 체계도 마련돼야 한다.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불안감,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위기 속에서 살 수는 없다.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지려면 끔찍한 보복을 각오해야 하고, 구애를 거절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야만 사회'다. 가해자의 인권을 위해 피해자의 목숨을 저버리는 법률은 바뀌어야 한다. 상대가 싫다는데도 끊임없이 들러붙는 것을 '구애 행위'로 여기는 인식도 사라져야 한다. 현행 법률은 가둘 수 있는 범죄를 날뛰게 하고, 지킬 수 있는 생명을 잃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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