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8>여왕의 시대, 다채로운 신라

천문 관장 우주 다스릴 '첨성대' 축조한 통일신라 주역

첨성대 일출. 여왕의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위해 첨성대를 축조했다.첨성대가 하늘과 소통하는 여왕의 능력을 드러내주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첨성대 일출. 여왕의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위해 첨성대를 축조했다.첨성대가 하늘과 소통하는 여왕의 능력을 드러내주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늦가을까지 유혹하던 핑크뮬리마저 색 바랜 흑백사진처럼 무심해진 첨성대는 겨울풍경 속에선 쓸쓸했다. 천년제국도 한 순간이었다. 온갖 꽃과 나비가 사라진 첨성대가 그제서야 온전하게 보였다. 초여름이면 다시 첨성대는 장미와 모란 등 꽃 들에 둘러싸여 우아한 곡선미를 다시 뽐내게 될 터다. 어스름이 가시기 시작한 이른 새벽, 첨성대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천년제국의 '영화'(榮華)를 떠올리게 했다.

◆여왕의 시대 도래

그때까지와는 다른 초월적인 권위를 과시할 무엇인가가 필요한 시대다. 하늘을 다스리는 능력을 보여야 했다. 왕사 '황룡사'에 하늘을 찌를 듯한 9층 목탑을 세우고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 '첨성대'(瞻星臺)를 축조한 것은 '여왕의 시대'를 만방에 과시하려는 대역사(大役事)의 일환이었다. 여왕 등장 이전에 천문을 관장하고 우주를 다스린 왕은 없었다.

선덕여왕 영정
선덕여왕 영정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 선덕왕이 즉위하자 신라왕실과 귀족사회는 물론, 늘 으르렁대면서 다투던 고구려와 백제에게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영류왕(營留王) 말년, 연개소문의 시대였고 백제는 무왕(武王)이 즉위한 지 32년 째 되는 최전성기였다.

여왕의 시대는 '선덕'(632~647) 15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진덕여왕'(647~654)으로 왕위가 계승되면서 22년간 지속됐다. 통일신라 말기인 887년 '진성여왕'이 즉위함으로써 신라는 여왕의 시대를 세 번 기록했다. 21세기에도 '여왕'은 대영제국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 자유민주주의 종주국 미국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백제 무왕은 여왕을 능멸하려는 의도에서 신라변경을 제집 드나들 듯이 침범하면서 희롱했다. 이미 미륵사 창건을 통해 '미륵세상'을 꿈꿨던 무왕이었다. 여왕으로서는 자존심을 넘어선 생존의 기로에 섰다. 여왕의 권위를 떨칠 특별한 무엇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당 태종의 책봉도 지체됐다. 당나라로서도 이웃 신라의 여왕 등극을 당혹스러웠지만 즉위 4년차에 당 태종은 여왕의 책봉을 승인하는 관작을 보냈고 모란꽃 그림을 선물로 보내 축하했다. 여왕의 즉위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한 '측천무후'에게 자신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측천무후는 당 태종의 후궁 신분이었다가 당 고종의 황후가 되었고 690년 마침내 황제가 된 아들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여왕이 됐다.

선덕여왕은 왕권의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위해 첨성대를 축조했다.
선덕여왕은 왕권의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위해 첨성대를 축조했다.

◆선덕여왕의 첨성대

여왕은 별과 혜성 등 천체의 운행을 살펴 국가의 길흉을 점쳤다. 그녀는 하늘을 다스릴 수 있는 출중한 능력을 가졌다. 지금껏 어떤 왕도 갖지 못한 하늘의 운행을 예측한 전지전능한 왕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황룡사 9층 목탑과 첨성대를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아비지를 불러 축조한 것은 여왕의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상징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풍만한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첨성대의 곡선미는 선덕여왕의 자태를 본뜬 것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우며 사리에 밝고 민첩한' 평판을 얻은 여왕이었다.

<삼국유사>는 '선덕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이라며 여왕을 높이 평가했지만 <삼국사기>의 평가는 달랐다. 김부식은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거늘 어찌 노구(할멈)로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재단케 하리요.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서 나라가 망하지 아니한 것은 다행이다 할 것이다." 라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여왕이라는 이유로 늘 왕권은 도전받았지만 40대 중반에 즉위한 선덕여왕의 치세는 15년간 지속되었다. 고구려에서는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정변을 일으켰고 백제는 무왕의 대를 이어 의자왕이 즉위해서 신라를 압박하는 등 여왕을 위협했다.

첨성대는 여왕의 권위에 날개를 달았다. 높이 9.17m의 나지막한 첨성대지만 여왕의 특별한 재능을 확립하는 데 손색이 없었다. 요즘처럼 도심 불빛을 피해 산 정상에 '천문대'를 세운 것이 아니라 왕궁 월성 바로 곁에 첨성대를 축조한 것은 첨성대가 하늘과 소통하는 여왕의 능력을 드러내주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30c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든 첨성대는 혼천의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해서 춘하추분과 동지 등의 24절기를 관측했다.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선덕은 제왕의 자질을 모두 갖췄다. 즉위 직후인 634년 황룡사 옆에 분황사(芬皇寺)를 지었다. 이름 그대로 '향기로운 여왕의 절'이었다. 국가위기가 닥칠 때마다 황룡사와 분황사에서 수시로 '백고좌회'(百高坐會)를 열어 부처의 힘에 기댔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층마다 물리쳐야 할 외적을 상징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탐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새겨 넣었는데, 한마디로 이들을 언젠간 신라 밑에 모두 무릎 꿇리겠단 의지였다..'(삼국유사)

선덕여왕의 시대는 임기 말 내부의 반란과 함께 막을 내렸다. 여왕이 상대등에 임명해 국사를 맡긴 비담이 염종과 더불어 "여자가 왕이 되어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무능하다"며 적국이 무시하는 여왕을 폐위하자는 명분으로 명활성에 진을 치고 반란을 일으켰다. 초반에는 반란군이 전세를 장악했지만 김춘추와 김유신이 반란을 제압했다. 귀족들의 반란은 향후 왕권에 도전해 온 서라벌 귀족의 몰락과 김춘추·김유신의 실권 장악 계기로 작용했다.

◆여왕의 시대는 계속된다.

선덕여왕 역시 부친 진평왕처럼 후사가 없었다. '비담의 난' 와중에 여왕이 승하하자 화백회의는 여왕의 사촌동생 승만을 두 번째 여왕으로 추대했다. 여왕을 폐위시키자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히려 여왕의 시대가 이어진 것은 아이러니다. 진덕의 시대는 신라가 본격적으로 삼국통일에 돌입한 시기다.

진덕여왕릉에 핀 해국. 한겨울에 해국이 피었다.
진덕여왕릉에 핀 해국. 한겨울에 해국이 피었다.

그런 점에서 진덕여왕의 시대를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덕여왕은 반란이 진압되자마자 즉위식을 거행했고 곧바로 비담과 염종은 물론 그들의 9족을 참수하는 것으로 왕권강화조치를 시행했다. 상대등에는 알천, 외교는 김춘추, 군사는 김유신에게 맡겼다. 김춘추를 즉시 당나라에 보내 '나·당연합'을 맺었다. 선덕이 첨성대와 황룡사9층 목탑을 축조하면서 대내외에 왕권강화를 과시했다면, 삼국통일을 향한 신라의 독자 행보가 본격화된 것은 진덕여왕의 시대였다. 국가생존을 건 건곤일척의 백제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고구려와의 전쟁에도 돌입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고 키가 7척에 이르렀다 또한 늘어뜨리면 팔이 무릎 아래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는 표현으로 진덕여왕의 외모를 칭송한 대목이 이채롭다. 최초의 여왕 선덕에 대해서는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조롱하던 김부식이었다. 두 여왕의 시대는 신라의 국운이 급상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역시 후사가 없는 진덕여왕에 이어 왕권을 장악한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절묘한 전략을 짰다. 마치 진평왕이 후계구도를 짜면서 진지왕의 아들들인 용수와 용춘을 각각 천명과 덕만 두 공주의 배필로 혼인시키면서 왕실내의 혼선을 사전 교통정리한 것처럼 말이다.

소나무에 둘러싸인 선덕여왕릉
소나무에 둘러싸인 선덕여왕릉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모든 과정은 두 여왕의 시대에 계획되고 시작되었다는 점을 재조명해야 할 것 같다. 그 계획이 성공하기까지는 불과 4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백제는 660년, 고구려는 668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진덕여왕 사후 230여년이 지난 통일신라 말기 51대 진성여왕(887~897)이 세 번째 여왕으로 등극했다. 이미 신라의 기운은 쇠했다. 진성여왕 역시 선덕과 진덕여왕처럼 하늘이 내린 여왕으로서 장대한 풍모를 갖췄고 총명했다. 게다가 두 여왕과 달리 20대의 나이에 즉위했다. 그래서였을까? <삼국사기>는 '음란'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그러나 그녀가 정(情)을 통한 것은 숙부 위홍이 아니라 남편 위홍이었고 '미장부'(美丈夫)를 두고 가까이 한 것은 역대 왕들의 관행이었다. 진성여왕은 위홍으로 하여금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을 편찬하게 했고 최치원을 기용하는가 하면 대사면을 단행하는 등 국정쇄신에 나섰다. 그러나 양길과 궁예, 견훤이 세력을 넓히면서 후삼국의 '군웅할거'가 시작된 시대였다. 3명의 여왕을 보유한 신라역사가 다채롭게 다가온다.

서명수
서명수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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