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인영의 풍수 이야기] <8>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봉산마을

거대한 봉황 머리 쭉 내밀고 둥우리로 날아 들어오는 듯
조선의사 이사룡 배향 옥천서원…하급 무관 출신 의로운 죽음에도 150년 후 정조 때 높이 평가받아
봉산마을 청룡 방 정상 태종 태실…태실 조건은 '땅 반듯 봉우리 우뚝'

봉황의 둥우리 형상과 봉산마을 전경
봉황의 둥우리 형상과 봉산마을 전경

국립공원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 8경의 하나로 불리어 왔다. 가야산 만물상은 "기암괴석의 향연", "자연의 교향악"으로 불린다. 가야산이 품고 있는 성주는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고려 때부터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를 많이 배출하였다. 성주군의 남단 용암면 대봉리(大鳳里)에 성산 이씨(星山 李氏) 집성촌 봉산(鳳山) 마을이 있다.

◆봉황이 머리를 내밀고 둥우리로 날아 들어오는 형상

봉산은 산세가 봉황과 연관이 있는 마을이다. 대봉, 봉산이란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지명의 상당수가 풍수 물형과 관련이 있다. 마을 진산이 봉황의 둥우리 형상으로 여기에 '옥천서원(玉川書院)'이 들어서 있다. 일반적으로 동물이 집을 지을 때는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고 자신은 잘 보이는 곳에 집을 짓기 마련이다. 그러한 위치에 해당되는 곳이 옥천서원의 자리이다.

풍수 물형으로 봉황귀소형(鳳凰歸巢形)이다. 옥천서원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사당과 가묘(家廟)가 일곽 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옥천서원 뒤편 산록에서 안산을 조망해 보면 거대한 봉황 한 마리가 머리를 쭉 내밀고 둥우리로 날아 들어오는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에 맞추어 건물을 대비시켜 보면 무엇인가 조화롭지 못하다. 즉 좌향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아쉽다.

좌측으로 15도 틀어 해좌 사향(亥坐 巳向)으로 놓으면 봉황의 등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서원 우측 편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바로 암봉(雌鳳)이다. 암컷을 뜻하는 방위인 곤(坤) 방에 위치한다. 봉황은 암수 동행을 하며 서식한다.

대봉이 날아 들어오는 형상의 안산
대봉이 날아 들어오는 형상의 안산

봉황의 둥우리 형상과 봉산마을 전경
봉황의 둥우리 형상과 봉산마을 전경

봉황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새이다. 봉황은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용·기린·거북과 함께 4령(四靈)의 하나로 여겼으며,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한다.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하며, 그래서 봉황은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휘장에는 봉황 한 쌍이 무궁화를 중심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장자(莊子)』에 "원추(鵷鶵)라는 봉황새가 남해에서 북해로 날아갈 적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물이 나오는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라고 한다. 따라서 봉황과 관련된 지명에는 봉황새 '봉(鳳)' 자나 대나무 '죽(竹)', 오동나무 '동(桐)', 단술 '예(醴)' 자 등이 들어간다.

서원에서 본 암봉(雌鳳)
서원에서 본 암봉(雌鳳)

◆ 대명충신 조선의사 이사룡

옥천서원은 이 마을 주민들의 선조인 조선중기 인물 이사룡(李士龍, 1595~1641)을 배향하고 있는 문중서원이다. 서원 명칭의 '옥천'은 이사룡이 평소 살던 곳에서 유래하였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인 이사룡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는 높은 관직을 역임하지도 않았고, 널리 알려진 선비도 아닌 하급 무관 출신임에도 서원에 배향된 사유를 알아본다.

이사룡의 자는 사중(仕中), 호는 괴정(槐亭)이며 본관은 성산이다. 1595년(선조 28) 성주 망성방 작촌리(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직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이정건(李廷建)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을 지냈다. 어영청 군사였던 이사룡은 화포와 조총을 다루는 솜씨가 걸출하였다고 한다.

옥천서원
옥천서원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한 청(淸) 나라가 명(明)을 공격하기 위해 1640년(인조 18) 조선군의 동원을 요구하자 이사룡도 여기에 징발되어 전장으로 끌려가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1641년(인조 19) 4월 금주(錦州)에서 명군과 전투에 참전하게 된 이사룡은 차마 명군을 향해 화포를 쏠 수가 없어 포탄을 제거한 채 공포(空砲)로 발포하였다가 청의 감시병에게 발각되었다.

청군이 이를 추궁하자 이사룡은 "명나라 조정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자의 은혜가 있다. 만약 우리가 명나라 사람에게 발포한다면 이것은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다.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청의 장수들이 그의 의기를 높이 사서 여러 차례의 회유와 협박을 하였으나 이사룡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은 군령을 어긴 죄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을 첩보를 통해 알게 된 명의 장수 조대수(祖大壽)는 장대에다 특별히 '대명충신 조선의사(大明忠臣 朝鮮義士)'이라 크게 쓴 깃발을 내걸어 자기 부대의 사기를 높였다. 이사룡의 의로움에 감동한 청 태종도 그를 정의롭게 여기고 시신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태봉에서 본 서기어린 자봉
태봉에서 본 서기어린 자봉

◆봉산마을 청룡 방 정상에 한때 태종 태실있어

이러한 의로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6대 왕을 거치고, 세월이 150여 년이 지난 정조 대에 와서 그 행적을 평가받는다. 정조는 "우리나라 명장으로는 충무공을 맨 먼저 손꼽을 것이지만 군사 출신으로서 천하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오직 이사룡이 그 사람일 것이다.(중략) 순절하여 특출하게 우리나라의 빛나고 걸출한 인물이 되었는데 신분과 문벌이 한미 하다고 아직껏 표창하는 은전을 내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풍교(風敎)를 세우고 이륜(彛倫)을 열어 주는 뜻이겠는가.

성주의 포수 이사룡을 특별히 성주목사로 추증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하며, 그의 후손을 우선적으로 벼슬에 등용시키고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이는 의(義)를 지키고자 한 이사룡의 죽음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정조는 조선이 청을 위한 구원병을 파견한 것은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배은망덕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이사룡의 순절이 있었기에 그나마 조선의 체면이 살게 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태봉
태봉

봉산 마을 청룡 방 정상에는 태종(太宗) 태실(胎室)이 있었다. 태실은 일제 강점기 파괴되었고, 태항아리는 1926년경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태실 조사 때 서삼릉으로 이장된 것으로 전해온다. 이곳에서 보면 곤방의 서기 어린 자봉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태실의 입지 조건은 '땅이 반듯하고 둥근 봉우리가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해야 하고, 좌청룡·우백호·안산은 따지지 아니한다. 땅의 지기를 얻기 위하여 반드시 내룡맥(來龍脈)이 대부분 비룡입수(飛龍入首)로서 용맥이 잘 연결되어 있어야한다'라고 되어 있다. 현재 태실로 추정되는 장소 부근에는 일반인 묘소 5기가 산재하고 있다. 태실이 있던 곳은 태봉, 태실, 태촌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 온다.

의사 이사룡의 죽음이나 태종 태실의 파손은 나라가 힘이 없어 일어난 일이다. 국력이 약하면 주변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옥천서원은 그의 순수한 혼이 깃든 곳이다. 봉황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그 이름 만세에 기억되리라.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노인영 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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