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19> 경주감성 교토감성(하)

교토시대 왕궁 '교토고쇼'처럼 신라 궁궐 '월성' 재현 기대
교토 여행 가봐야 할 '왕국과 정원', 막부 정치 수장 쇼군의 성 '니조조'
안팎 둘러싼 두 겹 '해자'도 볼거리

약 5백 년 동안 일왕이 기거하며 정무를 보았던 왕궁의 역할을 한 교토고쇼
약 5백 년 동안 일왕이 기거하며 정무를 보았던 왕궁의 역할을 한 교토고쇼

'고도'(古都)를 고도답게 하는 최고의 문화유적은 왕궁이다. 신라의 왕궁은 월성(月城)이었고. 교토시대 일왕의 왕궁은 '교토고쇼'(御所)였다. 도쿄(東京)로 천도하면서 천황의 거소도 에도로 옮겨졌다. 폐허가 된 '월성'과 '교토고쇼'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도 고도감성은 닮았다.

교토를 고도답게 해주는 것은 교토고소가 있기 때문이라면 경주 역시 월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굴 작업이 마무리되지 못해 복원하지 못한 月城의 화려한 면모를 재현하게 된다면 경주에서도 교토고쇼의 감성을 느낄 날을 기대해본다.

그러나 경주를 고도답게 하는 것은 사라진 왕궁이 아니라 대릉원을 위시한 왕들의 고분군이다. 대릉원과 봉황대·금관총 등을 잇는 노서·노동동 고분군은 고도의 정취를 제대로 만끽하게 해주는 왕들이 남겨 준 선물이자, 교토가 갖추지 못한 경주의 보물이다.

교토를 여행한다면, 교토고쇼와 교토교엔(京都御苑)을 가봐야 하는 이유도 경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의 교토고쇼는 고곤 천황이 즉위한 1331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천도한 1869년까지 약 500 년간 천황의 거처였다.

교토고쇼는 동서 250m, 남북 450m의 사각형으로 천황의 즉위식은 물론 각종 궁중행사가 열린 유서깊은 곳이지만 천도 후 왕궁의 기능을 잃었다. 지금은 '왕의 정원' 교토교엔이 조성돼서 벚꽃놀이와 단풍놀이 등을 통해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교토에 머물게 되면서 축성하도록 한 성인 니조성.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교토에 머물게 되면서 축성하도록 한 성인 니조성.

◆니조조(二条城)

일본정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쇼군'(將軍)과 막부(幕府)정치일 것이다.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일본의 막부정치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00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쇼군이 되면서 막부정치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이에야스가 천황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등장해서 교토에 머물게 되면서 축성하도록 한 성이 바로 이 '니조조'(二条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니조조를 보지 않고서는 교토의 진면목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왕궁보다 더 화려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니조조는 소박한 규모였다. 성 입구에 도착하면 폭 13m, 깊이 17m에 이르는 커다란 해자(垓字)가 성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쇼군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막강해졌지만 이에야스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겠다며 해자를 구축,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니조성 안쪽 해자
니조성 안쪽 해자

니조조는 성 밖에만 해자를 조성한 것이 아니라 성내에도 한겹 더 해자를 파놓았다. 안쪽 해자에선 팔뚝만한 잉어떼들이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따라 유영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해자 외에도 망루가 사방에 설치됐다. 이 망루에선 100여명의 무사들이 밤낮으로 경계가 설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고 한다. 경주 월성 주위로 지난 해 복원된 해자도 폭이 최대 40m에 총 길이는 550m에 이른다.

교토는 교토고쇼와 '니조조'로 인해 옛 수도로서의 위상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경주는 천년왕국의 유적으로 첨성대 외에는 월성 주변에 남겨진 것이 거의 없다. 월성과 남천(南川)을 잇는 월정교가 복원된 만큼 발굴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월성도 황룡사 9층 목탑과 거대한 장육존상 등과 더불어 복원된다면 경주는 천 년 전의 화려한 문화제국의 면모를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국사 입구에서 교토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입장권을 촬영했다.
불국사 입구에서 교토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입장권을 촬영했다.

◆불국사

교토에 기요미즈데라(淸水寺)가 있다면 경주에는 불국사(佛國寺)가 있다. 일본의 불교사찰은 일왕(천황)의 권위와 결부돼있을 때 흥성했지만 일왕과 갈등을 빚은 후에는 막부의 후원을 통해 대중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신라는 왕들이 현세의 부처를 자처하는가하면 신라를 불국정토(佛國淨土)라 여기면서 불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두 도시 모두 불교사찰이 온 도시를 촘촘하게 뒤덮을 정도로 많았지만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불심 가득한 불국토를 바란 곳은 신라였다.

불교든 기독교든 간에 모든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는 수단이었다. 피안의 세상을 현세에 구현하고자 한 신라인들이 신성시 한 불국정토는 남산이다. 황룡사와 분황사가 왕들의 사찰이라면 백성들은 남산으로 향했다.

김대성이 중창한 '불국사'는 신라인이 이상적으로 상상하던 피안의 세계를 구현한 불국(佛國) 그 자체였다. 이 땅에 불국을 건설하겠다는 신라인의 염원이 절 명칭 자체처럼 불국사창건에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불국구현의 염원은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그리고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라는 세 가지로 불국사 가람배치를 통해 구현됐다.

불국사
불국사

대웅전과 극락전과 비로전이 그것이다. 일주문을 통해 불국사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돌계단으로 이뤄진 석단이다. 석단 아래가 사바세계라면 석단 위는 부처의 땅인 불국인 셈이다. 그 불국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수학여행 단체사진 명소인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연화교와 칠보교라는 두 쌍의 다리다. 계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치 교토 기요미즈데라(淸水寺)의 부타이에 올라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불국사 복돼지상
불국사 복돼지상

◆불국사 복돼지

혹시라도 불국사에 가서 '복돼지'를 만나면 당신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수십여 년 전 수학여행으로 불국사를 다녀 온 기억 외에는 불국사를 가 본 적이 없는 중년들은 처음 들어보는 '복(福)돼지'일 것이다.

절이나 교회 등 종교시설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 복을 빌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전통적인 기복(祈福)신앙이다. 정월이나 초파일, 사찰에 가서 가족의 건강과 평온을 비는 연등을 다는 풍경은 일본의 사찰에서도 볼 수 있다.

불국사 복돼지상은 극락전 앞에 있다. 극락전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는 대웅전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법당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오르면 만나게 되는 부처의 나라 불국(佛國)이 바로 극락전이다. 극락전에 모신 아미타불은 마흔 여덟 가지 소원을 이뤄주는 부처로 그것을 이루면 서방에 극락세계를 만든다고 한다.

극락전 복돼지상은 서유기 속 '저팔계'를 닮았다. 저팔계는 생각이 단순하고 먹기를 좋아하는 돼지다. 돼지는 사찰 경내에서 종종 발견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절에서 돼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불국사 복돼지도 극락전 현판 뒤에 복돼지가 조각돼있다는 것을 수백년 동안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2007년 극락전 단청 보수공사를 하다가 발견됐다.

공교롭게도 그 해는 돼지해였다. 날카로운 어금니와 길쭉한 눈 그리고 누런 털까지 보일 정도로 세밀하게 표현된 돼지조각상이 무려 250여 년 동안 현판에 가려진 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극락전에 돼지를 조각한 것은 '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상서로운 동물이어서 재물과 건강 행복 등 福을 비는 기복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국사가 마련한 복돼지 안내판도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극락정토의 복돼지는 부와 귀의 상징인 동시에, 지혜로 그 부귀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극락전 황금복돼지상을 만나고 난 후 멀게만 느껴졌던 불국사가 푸근해졌다.

손을 내밀어 복돼지상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면서 소원을 마음껏 빌었다. 2017년 한 관광객이 불국사를 찾아 복돼지를 쓰다듬고 현판 뒤의 숨겨진 복돼지상에게도 소원을 빈 후 극락전에서 108배를 올린 후 로또 1등에 실제로 당첨되었다는 후기가 전해진 이후, 불국사를 찾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줄을 서서 복돼지상을 만지면서 복을 빌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불국사 순례코스가 됐다.

교토 고류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비슷하다. 일본이 국보1호로 지정할 정도로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이 반가상은 7세기(623년경) 신라에서 제작돼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교토 서북쪽에 있는 고잔지(高山寺)에는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대사의 초상화가 소장돼 있다. 이 절이 소장하고 있는 두 고승의 초상화는 실제 이미지와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 시절 신라와 일본, 경주와 교토는 그 때부터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료들이다. 교토를 가야할 이유가 더 많아졌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diderot@naver.com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