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다크 히어로의 탄생, 다시 볼 기회…30여 년만에 재개봉한 배트맨

1990년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재개봉

영화 '배트맨' 포스터.
영화 '배트맨' 포스터.

검은 협곡을 카메라가 헤쳐 나간다. 불안하던 음악이 웅장하며 드라마틱하게 변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협곡을 벗어나 공중으로 떠오른다. 드디어 드러나는 정체. 배트맨의 로고였다.

1990년 7월 한국에서 개봉한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의 오프닝이다. 요즘은 일상화된 기법이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본편은 이전 배트맨의 느낌을 완전히 지우면서 혁신적인 비주얼과 다크한 캐릭터, 전설적인 악역으로 관객을 매료시켰다.

다크 히어로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영화, '배트맨'이 재개봉했다. 당시 신예의 젊은 감독 팀 버튼의 '배트맨'은 4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세계에서 4억1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대성공을 거뒀다. 그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배트맨, 부르스 웨인의 다크한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준 것이다. 1966년판 '배트맨'은 노란 로고를 가슴에 단 회색 쫄쫄이를 입은 배트맨이 등장했다. 이는 원작의 모습이었고, 다른 TV 시리즈에도 적용됐다. 섬유의 질감은 강력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팀 버튼은 복근을 강화한 갑옷 같은 배트 슈트를 선보였다. 고개를 돌릴 때 몸까지 돌려야 했는데, 이는 더욱 파워풀한 배트맨의 운동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단단한 갑옷 속에 브루스 웨인의 우울하며 슬픈 고뇌를 담았다. 어린 부르스 웨인은 눈앞에서 부모님이 강도에게 살해된다. 그 트라우마는 커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강박증 환자로 발전한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고담시를 배회하며 박쥐 옷을 입고 악을 응징한다. 건물과 저택 또한 기괴한 고딕풍으로 마치 고대 성체처럼 묘사했다.

조악하고 평면적인 캐릭터였던 배트맨에서 환골탈태해 이제 번듯한 서사와 비주얼을 갖춘 배트맨이 탄생한 것이다.

영화 '배트맨'의 한 장면.
영화 '배트맨'의 한 장면.

두 번째는 악당 조커의 부활이다. 조커는 배트맨과 싸우다가 화약통에 빠져 중대한 부상을 입는다. 돌팔이 의사에게 수술을 받아 목숨을 건지지만 부작용으로 웃는 얼굴이 되고 만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는 기묘한 행동과 웃음소리로 배트맨과 결투를 벌인다.

당시에는 빌런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악당 탄생의 서사나 캐릭터의 정교함도 늘 무시됐다. 그러나 팀 버튼은 악역이 더 중요하다며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잭 니콜슨을 고집했다. 제작사는 회의적이었지만, 팀 버튼은 그들에게 흥행 대박이라는 경악할 만한 결과를 선사했다.

웃는 조커는 웃을 수 없는 배트맨의 기막힌 대척점을 보여준다. 잭 니콜슨이 연기한 조커는 어둡고, 그늘진 배트맨가 달리 화려한 의상에 자유분방한 악행으로 배트맨을 농락한다. 조커는 창백한 흰 얼굴에 초록색 머리카락, 진홍색 입술을 하고 있다. 의상도 파격적인 보라색이었다. 선과 악의 고색창연하던 이분적 대결이 스타일리시한 색깔을 입은 모던 에이지 '배트맨'이 된 것이다.

조커는 어린 갱단 시절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살해한 강도였다. 마지막 대결에서 조커가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You made me)"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배트맨이 일격을 날리면서 "네가 먼저 그랬어(You made me first)"라고 응수한다. 선과 악이 모호한 영웅탄생의 음울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 주는 대사였다.

잭 니콜슨의 조커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에서 'Why so serious'(뭐가 그리 심각해?)라던 히스 레저의 조커로 피드백된다.

'배트맨'에서는 첨단 장비들이 등장하는데 박쥐 형상을 한 배트윙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곡선이 우아한 배트카가 눈길을 끌었다. 옛 롤스로이스 느낌의 체형에 검은색으로 도색해 제트엔진을 달아 불을 뿜는 파워풀한 이미지였다. '다크 나이트'에서는 각진 형태의 배트모빌로 진화한다.

영화 '배트맨'의 한 장면.
영화 '배트맨'의 한 장면.

'배트맨'에서는 조커가 짝사랑하는 여기자 비키에 당시 최고의 섹시 여배우 킴 베이싱어가 출연해 선과 악의 극을 잇는 우아한 고리 역할을 하며, 팀 버튼의 '비틀 쥬스'(1988)에서 음악감독을 했던 대니 앨프먼이 메인 테마곡을 맡아 이후 배트맨 주제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팀 버튼이 이룩해 놓은 '배트맨'의 어두운 이미지는 조엘 슈마허 감독의 3편 '배트맨 포에버'(1995), 4편 '배트맨 앤 로빈'(1997)에 이르러 알록달록한 색깔만 남은 만화풍으로 변질해 버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을 다시 과거로 되돌릴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지난 2020년 개봉한 '더 배트맨'까지 많은 배트맨 영화를 보았지만, 팀 버튼의 '배트맨' 만큼 놀라운 영화는 없었다. 1990년 지금은 사라진 대구극장에서 본 그 경이로움을 극장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126분. 전체 관람가.

김중기 영화평론가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