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6> 1964년 하늘에서 본 대구, 지금은?

전태일·이윤복 거닐던 거리…빌딩 숲 사이 보일 듯 말 듯
전, 여섯식구 단칸 셋방살이…이, 신문·껌 팔아 동생 돌봐
중앙통 벗어나면 한옥 일색…60년 지나 큰 건물로 뒤덮여

1964년 경 대구 명덕네거리 상공에서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서문시장, 달성공원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 초가와 기와 한옥 사이로 큰 건물은 대부분 학교와 종교시설이다. 오른쪽에 종탑이 뾰족한 건물은 계산성당, 그 왼편으로 큰 건물은 종탑을 짓기 전 서현교회 모습이다. 효성여고(현 천주교 교육원) 운동장 끝자락에서 셋방을 살았던 전태일 고향집도 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4년 경 대구 명덕네거리 상공에서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서문시장, 달성공원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 초가와 기와 한옥 사이로 큰 건물은 대부분 학교와 종교시설이다. 오른쪽에 종탑이 뾰족한 건물은 계산성당, 그 왼편으로 큰 건물은 종탑을 짓기 전 서현교회 모습이다. 효성여고(현 천주교 교육원) 운동장 끝자락에서 셋방을 살았던 전태일 고향집도 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누런 봉투에 묵직하게 든 1960년대 필름 뭉치. 반세기를 훌쩍 넘겨서야 먼지를 털고 마주했습니다. 루뻬(확대경)속에 보이는 찰나의 순간들. 알 듯 말 듯 아스라한 필름 속을 헤메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늘을 날며 기록한 지난 날의 대구였습니다.

언제, 왜 찍었을까? 1960년 초 신문부터 몇 년치를 훓었습니다. 계절이 바뀌도록 의문을 풀지 못했습니다. 되돌아 갈 순 없지만 추억이 생생한 사진만으로도 값진 기록. 그때를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너머 멀리 달성공원에 어렴풋이 보이는 건 일제가 남긴 대구신사 건물(현 물개 사육장 부근). 1966년 8월 13일 대구신사 건물이 헐리기 전 이곳엔 한때 단군 성전이 자리하기도 했습니다. 한옥 사이로 우뚝한 서현교회는 1957년 착공 후 수 년째 건축 중으로, 확인 결과 종탑을 올리기 전 1964년 경 모습으로 밝혀졌습니다.

대명동과 앞산 안지랑골 풍경. 과수원과 논밭 가운데 자리한 건물은 1962년 개원한 대구 가르멜 여자수도원. 안지랑골에서 내려오는 물길은 복개돼 곱창골목으로 변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대명동과 앞산 안지랑골 풍경. 과수원과 논밭 가운데 자리한 건물은 1962년 개원한 대구 가르멜 여자수도원. 안지랑골에서 내려오는 물길은 복개돼 곱창골목으로 변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중동과 수성들. 신천과 중동교 주변에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중동)을 이루고 있다. 시가지가 확장되기 전 신천 동편은 이처럼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중동과 수성들. 신천과 중동교 주변에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중동)을 이루고 있다. 시가지가 확장되기 전 신천 동편은 이처럼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4년 대구는 중앙통(로) 일대만 벗어나면 사방이 초가와 한옥 일색이었습니다. 앞산 자락엔 다랑논과 과수원이, 수성들엔 드넓은 파밭이 장관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도시민이지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은 돈벌이를 찾아 이곳 저곳을 떠돌았습니다. 너나없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게 제일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일대 풍경. 교구청 주변은 온통 한옥주택으로, 당시 번화가인 중앙통 일대만 벗어나면 대부분 이처럼 초가와 한옥 일색이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일대 풍경. 교구청 주변은 온통 한옥주택으로, 당시 번화가인 중앙통 일대만 벗어나면 대부분 이처럼 초가와 한옥 일색이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명덕국민(초등)학교와 명덕로타리 일대 풍경(왼쪽). 명덕로타리에는 시민 모금운동으로 1962년 4월 19일 2.28 민주의거 기념탑이 제막됐다. 명덕로타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보이는 큰 건물은 현재 경북여상, 경북예고, 대구교육대학교 건물이고 그 옆으로 경상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명덕국민(초등)학교와 명덕로타리 일대 풍경(왼쪽). 명덕로타리에는 시민 모금운동으로 1962년 4월 19일 2.28 민주의거 기념탑이 제막됐다. 명덕로타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보이는 큰 건물은 현재 경북여상, 경북예고, 대구교육대학교 건물이고 그 옆으로 경상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딱 저 무렵 전태일이 그랬습니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1962년 8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남산동 단칸 셋방에서 무려 여섯식구와 함께 살았습니다. 효성여고(현 천주교 교육원) 운동장 끝자락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고향집. 예나 지금이나 그대롭니다.

1964년은 또한 이윤복의 시대였습니다. 당시 윤복이는 명덕국민(초등)학교 4학년. 그는 노름에 빠진 아버지와 집 나간 어머니를 대신한 소년가장이었습니다. 신문과 껌을 팔아 동생 셋을 돌봤습니다. 틈틈이 쓴 그의 일기장은 각본이 돼 1965년 개봉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대구상업고(왼쪽)와 경북사대부고 건물. 대구상업고는 1923년에 설립됐고 경북사대부고는 1923년 경북도립사범학교로 개교한 뒤 대구사범학교로 교명을 바꿔오다 대학기능이 경북대로 흡수, 통합되고 1946년부터 중고등학교로 개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이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출신이다. 사진 매일아카이빙센터
대구상업고(왼쪽)와 경북사대부고 건물. 대구상업고는 1923년에 설립됐고 경북사대부고는 1923년 경북도립사범학교로 개교한 뒤 대구사범학교로 교명을 바꿔오다 대학기능이 경북대로 흡수, 통합되고 1946년부터 중고등학교로 개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이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출신이다. 사진 매일아카이빙센터
신천 옆 수성동 풍경. 맨 앞 건물은 대륜고(현 신세계타운), 멀리 남산여고(현 남산고)와 신명여중, 수성교가 차례로 보인다. 1942년부터 이곳에 자리했던 대륜고는 1988년 12월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신천 옆 수성동 풍경. 맨 앞 건물은 대륜고(현 신세계타운), 멀리 남산여고(현 남산고)와 신명여중, 수성교가 차례로 보인다. 1942년부터 이곳에 자리했던 대륜고는 1988년 12월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대륜고와 초가집 풍경. 1921년 개교한 대륜고는 1942년 5월 남산동에서 이곳 수성동으로 이전해 온 뒤 1988년 12월 다시 수성구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저항시인 이상화는 이 학교 교사였으며, 독립운동가 이육사는 이 학교 출신이었다.
대륜고와 초가집 풍경. 1921년 개교한 대륜고는 1942년 5월 남산동에서 이곳 수성동으로 이전해 온 뒤 1988년 12월 다시 수성구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저항시인 이상화는 이 학교 교사였으며, 독립운동가 이육사는 이 학교 출신이었다.

가난이 원수였습니다. 교육만이 살길이었습니다. 당시 동네마다 제일 큰 건물은 성당과 교회 그리고 학교. 재건운동이 한창이던 이 무렵 이들은 신문물로, 교육으로 근대화를 이끌었습니다. 시골 수재들은 너나 없이 대구로 몰려왔습니다. 대구는 이때부터 교육도시였습니다.

1964년 대봉동 상공에서 가창 방면으로 촬영한 사진. 맨 아래 건물은 편창제사(현 대봉태왕아너스), 그 너머가 경북고(현 청운맨션)다. 신천 왼쪽 상류부터 상동, 중동교, 중동, 제5관구사령부가 자리하고 있다. 길게 뻗은 도로(현 대봉로) 멀리 왼쪽은 대봉초, 대구중, 오른쪽은 미군기지(캠프헨리)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4년 대봉동 상공에서 가창 방면으로 촬영한 사진. 맨 아래 건물은 편창제사(현 대봉태왕아너스), 그 너머가 경북고(현 청운맨션)다. 신천 왼쪽 상류부터 상동, 중동교, 중동, 제5관구사령부가 자리하고 있다. 길게 뻗은 도로(현 대봉로) 멀리 왼쪽은 대봉초, 대구중, 오른쪽은 미군기지(캠프헨리)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대봉동 경북고(현 청운맨션 자리) 옆 굴뚝이 높은 건물은 1919년 일본인이 세운 편창제사(현 대봉태왕아너스 일대). 누애고치로 명주실을 뽑는 공장으로, 이 때는 한국인이 운영했습니다. 편창제사 부지는 무려 2만5천평(약 8만3천㎡). 편창제사와 함께 조선제사, 대구제사 등 대구에서 생산한 수량은 전국 생산량의 38%. 섬유도시 명성도 이때부터 자자했습니다.

2023년 12월 수성못 상공에서 본 대구. 아파트, 고층 빌딩이 성냥갑 마냥 빼곡하게 들어섰다. 대구 인구는 1949년 31만명에서 1969년 말 100만명을 돌파했고 2000년 252만명을 정점으로 2024년 1월 현재 235만명이 살고 있다. 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2023년 12월 수성못 상공에서 본 대구. 아파트, 고층 빌딩이 성냥갑 마냥 빼곡하게 들어섰다. 대구 인구는 1949년 31만명에서 1969년 말 100만명을 돌파했고 2000년 252만명을 정점으로 2024년 1월 현재 235만명이 살고 있다. 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60년 세월도 어제 처럼 휙 지났습니다. 그렇게 컸던 학교, 성당, 교회는 빌딩 숲에 쏙 파묻혔습니다. 이제는 매일매일 다이어트 하는 게 큰 걱정거리가 됐습니다. 전태일, 이윤복이 지금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빛 바랜 사진속에 멈춘 1964년 대구. 배고팠던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수성못 상공에서 본 파동과 신천. 신천은 백사장이 꽤 넓게 보이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가창면 용계리에 1959년 8월 가창댐이 들어서 물을 가둔 바람에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아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수성못 상공에서 본 파동과 신천. 신천은 백사장이 꽤 넓게 보이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가창면 용계리에 1959년 8월 가창댐이 들어서 물을 가둔 바람에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아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신천동에서 대구 시가지를 촬영한 사진. 왼쪽 다리는 1964년 건설된 동신교, 오른쪽으로는 경부선이 지나는 푸른다리, 대구선이 지나는 신성교, 1962년 10월 8일 확장 준공한 제1신천교(현 칠성교)가 차례로 보인다. 경부선 철길 옆 저수지는 훗날 메워져 1970년 9월 1일 동신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신천동에서 대구 시가지를 촬영한 사진. 왼쪽 다리는 1964년 건설된 동신교, 오른쪽으로는 경부선이 지나는 푸른다리, 대구선이 지나는 신성교, 1962년 10월 8일 확장 준공한 제1신천교(현 칠성교)가 차례로 보인다. 경부선 철길 옆 저수지는 훗날 메워져 1970년 9월 1일 동신초등학교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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