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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습니다] "항상 정의롭게 살아라"…아버지는 내 꿈 키워준 정신적 지주였죠"

중국문화원 원장 안경욱 씨의 아버지 고(故) 안봉식 씨

대학 입학식 때 찍은 사진. 왼쪽부터 아버지 고(故) 안봉식 씨, 나(안경욱), 어머니. 안경욱 제공
대학 입학식 때 찍은 사진. 왼쪽부터 아버지 고(故) 안봉식 씨, 나(안경욱), 어머니. 안경욱 제공

"경욱아! 오늘 돼지고기 사 왔는데 나하고 막걸리 한 잔 할까?" 갑자기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오셨다. 예정에 없던 술 한 잔 하자고 하신다. 무슨 일일까?

오늘도 시내에서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대규모 집회가 있는 날이라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혹여 집회에 참석했다가 다치거나 잡혀갈까봐 걱정이 되셨기 때문이리라. 1980년대 중반 나는 대학생이었다. 당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와 시내에서 집회가 열렸다. 나는 한 번씩 교내에 붙일 대자보 초안을 작성했고, 그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리곤 했다.

1932년생인 아버지는 예천에서도 깡촌인 풍양면 흔효리 출생이시다. 깡촌 출신이어도 전문대학까지 공부하셨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이곳저곳 여러 직장을 다니셨다.

이런 사정으로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다. 지금 어머니의 연세는 92세이다. 고향 예천과 문경에서 초가집 셋방살이할 때 어머니는 남의 집 논, 밭일을 하러 다니셨고 점촌으로 이사 와서는 고등어, 갈치, 꼬꾸레미(양미리의 방언) 등을 이고 산골 동네를 다니시며 팔러 다니셨다.

그렇게 남의 집 셋방살이를 전전하다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로 이사 나왔다. 대구에 정착하면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제대로 된 가족생활이 시작됐던 걸로 기억한다.

한때 나는 아버지를 따라 잠시 시내 중앙공원 앞에서 리어카를 개조한 땅콩판매대를 지켰던 기억도 있다. 그래도 가난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초등시절 1년 육성회비 3천600원을 납부하지 못해 육성회비를 받아오라는 담임 선생님의 명령으로 수업시간에 집을 오갔던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나에게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함께 사회에 대한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리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부분만 도려내면 아버지는 어릴적 내게 더없이 많은 영향을 주셨다. 물론 우리 형제들에게는 매우 엄하고 무섭기만 한 분이셨고 다정다감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7남매 중 넷째이자 장남인 나를 불러 매일 밤 팔베개를 해주시면서 옛날 이야기를 한 편씩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꿈을 키웠고 나에 대한 아버지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뒤 나는 31세 나이에 대구시의원에 당선됐다. 가난하고 힘없지만 정직하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민중의 든든한 언덕이 되기 위해 출마했다. 시의원이 되기전엔 꽃집 배달원, 그 이전엔 달동네 고성동 철거대책위원장, 기업체 노조위원장 등 활동도 했었다. 당시 아버지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서서 당당하게 살라고 당부하셨다.

비록 지금은 지역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애초 가졌던 꿈과 목표에서 멀어져 중국문화원 일을 하고 있지만 이 역시 민간 외교로서 한·중 간 우호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으로 소임을 다하고 있다.

나는 한 번씩 힘이 벅차거나 아버지가 생각날 때 고향을 찾는다.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예천 삼강주막을 건너가면 아버지는 고향 산천 어귀에서 나를 맞이하신다. 68세에 병환으로 일찍 세상을 등지신 아버지는 내 인생의 정신적인 지주이시다. 눈 내린 산천이 더 아름다운 내 고향, 예천의 깡촌. 겨울이 가고 날이 좀 따뜻해지면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 오늘도, 막걸리가 몹시 그립다. 아버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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