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인생은 평생 커가는 것이다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선생님, 저 같은 환자는 처음 보시죠? 자신의 인생 역정을 털어놓으시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 많이 듣는 이야기다. 본인은 기구한 사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마다 어깨에 진 짐의 무게와 부피 색깔과 모양이 다를 뿐, 인생의 고되고 힘든 강을 건너는 일은 살아가는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까.

이런 문제로 정신과 보다는 철학관을 찾는 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철학관 하시는 분들도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그 사람의 성별이나 나이에 맞는 인생의 고민을 대충 짐작하고 적절한 가이드를 제시하고 불안을 잠재워 주는 좋은 역할을 하니 말이다.살아가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풀어야할 인생의 숙제는 어김없이 다가온다.

청년은 취업 걱정을 하고, 누군가는 이별의 순간을 맞아 동토에 홀로 서있는 듯한 외로움으로 치를 떨기도 한다. 어느 날 내게 남아 있는 날들이 보이는 거 같을 때, 나만 못나서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고독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늘 약간의 불안과 우울, 약간의 걱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마음의 건강함이라는 것은 완벽함에 있지 않다. 완벽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불필요한 것이고, 내게 주어진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 인생길이다.

어떤 분야이든 고통을 이기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들은 힘든 시기를 겪고 나서 체득한 경험과 노하우를 모아서 하나의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존경하는 골프 챔피언이 그렇다. 집안이 어려워서 고등학교까지 겨우 졸업하고, 음료 박스 배달일, 산위에 전봇대 옮기는 일 등 온갖 막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중년에 골프를 처음 배워서 일 년 만에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클럽 챔피언을 지냈다. 매일 연습하고 체력단련을 위해 갓바위에 오르고 환경을 탓하거나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유명한 철학자나 전문가들한테서 들을법한 인생철학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이것이 <지혜>라고 생각한다. 지혜는 인생의 숙제를 잘 풀어낸 사람들,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고비를 잘 넘겨온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빛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고졸이든 막노동꾼이든 상관없이 심오한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18살이 지나면 발달이 끝나고 그때부터 퇴행으로 접어들어 더 이상 발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은 인간은 평생에 걸쳐서 8단계의 발달이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끝없이 발달하고, 각 단계마다 중요한 미션이 있다고 했다. 소아 청소년기에는 키도 자라고 두뇌도 커지면서 구조적 성장이 일어나지만, 어른의 발달은 마음이 재편성되면서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한쪽이 좀 많으면 줄이고, 내성적인 사람이 약간 외향적으로 변하고, 모난 성격이 좀 둥글둥글해지고, 이런 변화가 재구조화이다.

난 원래 성격이 그래. 한번 아니면 아니야. 이런 고집보다는 싫은 것도 좀 해보고, 낯선 것도 버티어 보는 것, 그래서 아주 조금 더 수월하게 살아지는 것, 견디다보면 괜찮다는 여유도 생기고, 마음이 더 넓어지고, 내가 생각하는 마음의 안전지대가 좀 더 커지는 것, 마음의 인테리어를 다시 하는 것, 그게 바로 마음의 재구조화다.

중년의 시기에는 자식을 키우고 부모를 돌보며 사회를 지탱해오다가 더 이상 내가 나누어줄게 없고 능력도 한계에 다달았고 이제 내리막길만 남았구나라는 심리적 위기가 찾아온다. 인생의 침체기에 빠질 때, 이런 어둠을 극복하는 것이 50대의 발달 미션이다.

철학관에서 말하는 초년 운이 없으면 중년운이나 말년운이 따라 온다는 말도 있고 인생의 초기에는 알지 못했던 깨달음 같은 것도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더니 철들었다는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가 생기고, 적응하는 방법도 알아가고, 질적으로 성숙했다는 뜻이다. 절에 들어가거나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노력하는 존재로 사는 것이 성숙해지는 길이다.

60세가 넘으면 인생의 의미가 뭐지, 그동안 내가 왜 살았고 내 존재의 의미는 뭐지, 이런 생각들을 통합을 해나가는 시기다. 이런 것이 무의미해지면 절망의 노년기로 해체되어 갈 것이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중년을 지난 사람들은 이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 키타노 다케시의 영화 <키즈 리턴>의 마지막 대사에서 답을 찾는다.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아직 시작도 안했자나.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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