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 조선의 붕괴와 소국들의 독립전쟁 및 통일작업
기원전 108년. 1년 간에 걸쳐 한나라와 '조한 전쟁'을 벌이던 위만조선은 토착세력들의 반란과 내부의 분열까지 겹쳐서 끝내는 붕괴했다. 이후 많은 소국들이 우리 역사에 등장했다. 우리 역사학은 오랫동안 이 소국들을, 아니 삼국의 전기까지도 '부족국가'로 정의했었다. 후에는 '성읍국가' 등의 용어로 명명하였다. 그 소국들이 마치 우리 역사의 최초 정치체이며 후진 적인 것처럼 논리를 전개했고, 그것도 한사군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것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틀렸다.
한국의 지식인, 역사학자들은 국가의 흥망, 특히 붕괴와 연관된 메카니즘과 이론에 취약하다. 첫째, 한 국가가 멸망했다는 사건은 정치적으로 진공상태가 되었고, 정치권력을 담당하는 지배집단이 바뀐 것이다. 주민들은 비록 전쟁과정에서 전사하고, 포로나 노예로서 끌려갔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살아있다. 영토는 빼앗길 수 있고, 지배당할 수 있지만 생활의 터전인 토지, 산천, 하늘 등 생태계는 그대로 있다. 둘째, 승전국이 패전국을 영원히 지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더구나 이질적인 집단인 원정군이 정치적인 지배를 장기간 지속시키는 경우는 세계사에도 아주 드물다. 당연히 조선의 유민들은 복국 전쟁, 또는 독립 전쟁이 일으켰을 것이다. 한나라는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조선의 영토와 백성들을 직접 통치할 능력이 없었고, 그러한 국가시스템도 아니었다. 더구나 '슝누(흉노)' 등과 충돌하는 긴박하고 불안정한 국제정세 속에서 한나라는 점령지를 관리할 능력이 약했다. 실익이 적거나 오히려 손해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옛 주민들은 시대상황이 변화가 생기고, 독립과 해방이라는 자각이 생기면서 독립전쟁을 벌였다. 곧 진번과 임둔을 몰아내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까지 몰아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숱한 소국들이 생성됐고, 이 들 간에는 불가피하지만 경쟁과 갈등이 치열했다. '삼국유사'는 조선(왕검조선,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설정하여 '조선 정통론'을 보인다. 나는 '고조선' 이라는 용어를 비판적으로 여기고, 실질적인 역사상에 충실하여 '원(原)조선' 즉 'proto 조선'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소국들은 초기의 신흥국가들이 아니라 조선의 문명과 문화, 기술과 자원, 역사의식을 계승한 '후 조선', 즉 'post 조선'의 구성원들인 것이다.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는 "시라(신라), 고례(고구려), 남북 옥저, 동북 부여, 예맥이 모둔 단군의 후손이다"라고 썼다. 이 소국들은 종족, 언어, 문화 등이 유사하고, '원조선'이라는 공동의 역사적인 경험을 보유한 일종의 '역사 유기체'였다. 그러니까 관계가 없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병렬로 된 열국의 구조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문화적, 종족적으로 계승한다는 국가의 목표를 세웠고, 이것을 정통성의 확보와 발전의 큰 명분과 힘의 원천으로 삼았을 것이다. 일종의 국시(國是)였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100년 가까운 소국들 간의 경쟁과 투쟁 등은 붕괴된 원조선을 복구하고, 분열된 국가들을 통일시키는 '통일전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질서와 경쟁체제에서 초기에 성공한 나라가 부여였다.
◆부여는 어떻게 태통했는가?
중국의 역사책에는 부여 또는 북부여와 관련된 부분에 고리(槀離)국, 색리(索離)국, 탁리(橐離)국, 구려 등이 있다. 목판본이므로 한 글자가 약간 달라진 결과이다. 1세기 경에 쓰여진 '논형' 길험편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주몽) 탄생신화의 원형이 기록됐는데, 동명은 고리국에서 와 부여왕이 됐다고 했다. '삼국지'나 후대의 책인 '양서' 고구려조에도 고리국으로 기록했다.
북한 역사학은 고리국의 위치를 북류 송화강의 하류와 눈강 하류인 대안과 농안 일대로 추정한다. 중국도 부여가 탁리(고리)에서 기원했고, 그 조상들이 이룩한 문화가 중만주의 눈강 일대인 '백금보 문화'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중국의 '상서'(尙書)나 '일주서'(逸周書) 등을 보면 기원전 12세기에 '구려'란 나라가 주나라와 교섭을 하였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고조선은 서기전 10세기 경에, 부여는 서기전 7세기, 그리고 구려는 서기전 5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여러 기록들과 건국 신화에 대한 해석, 국제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북부여가 우리 민족역사에서 주요한 존재로 태통된 것은 기원전 1세기 중반 무렵에 등장한 해모수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모수는 몇 몇 사료들에 따르면 '북부여'라는 나라의 임금, 즉 천제였다. 그가 역사에 등장할 무렵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이다. 그는 하늘로 성징되는 이주 세력이고, 토착 세력의 대표인 하백은 동부여도 아닌 다른 집단이다. 해모수는 하백의 딸인 유화와 결혼하여 두 세력의 공존과 부여 세력들을 통일시키고, 고구려가 건국하는 토대를 놓았다. 그 과정을 상징화시킨 것이 '동국이상국집'에서 인용한 '구삼국사'의 내용이다. '삼국유사'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로 기술하였고, 또 '단군기'를 인용하면서 단군이 비서갑(非西岬)의 딸과 결혼하여 부루(夫婁)를 낳았음을 밝혀 단군이 곧 해모수라는 인식을 보인다. 그 시대에 모든 소국들은 부여의 천제인 해모수를 단군이라고 인식했고, 천제, 황천, 해(日)라고 모시며, 신으로 받들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 시대에 세워진 집압시 동쪽의 모두루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에는 "~ 하백의 손자, 해와 달의 자식이며, 추모성왕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 라고 밝혔다. 장수왕이 414년에 새겨서 기록한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엣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다.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 편 등도 거의 유사한 내용이 있다.
중국 측의 사료도 고구려가 부여를 계승했다는 인식이 반영됐다. '위서'는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스스로 주몽이 선조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의 고구려조에는 '서로 전하기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하는데, 그 때문에 언어와 법속이 대부분 같다~'라고 기록됐다. '주서' 고려조, '수서' 고려조에도 고(구)려의 선조는 부여라는 내용이 있다. 이 후에 나온 책들도 거의 유사한 내용을 기록했다. '삼국유사'는 북부여조에서 동명이 북부여를 계승했는데, 졸본천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동명'과 '주몽(추모)'은 항상 동일한 인물은 아니지만, 고구려 시조로서의 동명은 부여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는 북부여와 동부여를 직접적인 근원으로 삼아 이주정권으로서 성립한 홀(졸)본부여라는 토착세력과 연합해서 건국한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인들은 부여가 자신들의 근본이고, 원향임을 스스로 선언했다. 그리고 홀본부여의 중추 세력인 소서노는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신하들과 대거 남족으로 이주하여 경기만을 중심으로 백제를 건국했다. 부여 정통성과 계승성을 표방하고, 왕의 성을 '부여(夫餘)'로 삼았으며, 동명신앙과 무덤 양식 등의 문화도 계승했다. 심지어는 성왕이 수도를 사비로 천도할 때도 국호를 '남부여'라고 명명했다.
◆부여계 사람들이 만든 유라사아 역사상
부여의 발생한 중심 지역은 현재로서는 중만주인 눈강 하류와 북류 송화강의 하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초원으로 연결된 북방 유목문화가 내려온 곳이고, 농경지가 넓어 농사가 발달해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했으며, 모피와 금 등의 자원이 풍부했다. 사료에 기록됐듯이 명마의 산지이고, 활을 잘쏘아서 뛰어난 기마문화를 발전시켰다. 1995년도에 고구려의 기원과 부여의 문화를 밝힐 목적으로 말을 타고 대안을 출발하여 농안 길림을 거쳐 국내성이었던 집안까지 16일 동안 내려오면서 체감을 했다.(윤명철 '말타고 고구려가다')온 적이 있다.
부여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북부여, 동부여, 홀본부여, 갈사부여, 남부여, 두막루 등의 나라들을 건설했다. 고구려보다 먼저 중국 측과 교섭했고, 전성기에는 사방 2,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운영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고, 광개토태왕때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또한 혈연적으로 가까운 선비 계통의 종족들과 퉁구스계인 읍루·물길 등의 압박을 받아 어려운 역사를 이루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주도세력이 됐고, 가야와 신라, 심지어는 일본열도의 소국에도 강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부여의 영향과 피와 생각이 스며들었던 선비족 거란족 등의 많은 종족들과 그들이 세운 나라들은 이후에 만주의 역사에서 주역 역할을 했다. 또 일부는 중국지역으로 들어가 정복국가들을 세웠다. 일부는 서북의 초원지대로 진출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에 엄청난 족적으로 남겼다. 부여와 그토록 가까웠던 몽골어계 종족들은 남시베리아, 카프카스 지역, 유럽의 판노니아 평원과 발칸반도까지 진출했고, 훗날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또한 해모수와 부여인의 피에 적지않이 흘러 들었을 투르크어계 종족들은 흉노, 훈이라는 이름으로 유라시아 세계예 큰 말발자욱을 찍었다.
우리 역사에서 부여는 독특하고 다양하며, 민족역사의 큰 줄기를 세웠으며, 역동적이고 자의식 강한 하늘신앙을 낳게 한 나라이다. 그렇다면 부여인들은 생물학적으로 어떤 성분을 지녔고, 어떤 문화를 영위했으며, 어떤 생활을 했고, 산업은 어떤 정도로 발전했을까?
역사의 이해는 관념이 아니라 실생활이며,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의 향방이나 명분 이데올르기가 아니라 생활이다.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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