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고향 의성] <3>고대국가 조문국(召文國)의 전설

2천년 전 왕국의 비밀 속삭이듯…붉은 작약꽃 수줍게 인사

조문국사적지에 핀 작약.5월의 햇살아래 활짝 핀 작약꽃들이 조문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찬란했다.
조문국사적지에 핀 작약.5월의 햇살아래 활짝 핀 작약꽃들이 조문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찬란했다.

◆200여기의 거대한 고분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 패망후 연의 후예들이 한반도에 '왜북'(倭北)과 '왜속연'(倭屬燕), 그리고 여성우위의 '여인국'이었다는 전설속의 조문국은 실재(實在)했다.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와 탑리리, 학미리 일대에 산재한 200여기의 거대한 고분이 있다. 경주일대의 신라고분만큼이나 많은 고대고분의 존재는 이 일대에 고대왕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조문국(召文國)이다. 1960년 첫 고분발굴을 시작으로 조문국의 비밀이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의성지역 곳곳에 산재한 지석묘 100기를 통해 적어도 청동기-초기 철기시대에 강력한 정치권력을 가진 집단이 의성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지만 의성에 뿌리를 내린 첫 고대국가는 조문국이었다.

"'벌휴이사금' 2년(서기 185년)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진찬 구수혜(仇須兮)를 배(拜 벼슬을 내려)하여 두 군주(軍主)로 삼아 조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군주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조문국에 대한 기록문헌은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벌휴이사금조(條)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에도 '아시촌에 소경(小京)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권7 문무왕조에 '조문성(召文城)'이라는 표현, 권34 지리지에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韶文國)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으로 4개 지역을 관할한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발간된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 등 기타역사서에도 조문국은 계속 언급된다.

조문국사적지
조문국사적지

◆조문국은 신라와 동맹관계

그러나 금성면 대리리 등의 거대고분군이 발굴되기 전까지 고대왕국 '조문국'의 비밀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전설이었다. <삼국사기>의 사로국(신라)의 조문국 정벌 문헌기록으로만 보면 조문국은 그 때 이후 사라졌어야 했다. 조문국사적지 고분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은 조문국이 최소한 6C 전반까지 의성지역 지배세력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신라 금동관과는 달리 새 깃털모양의 '조우'(鳥羽 새 깃털모양)형태 왕관은 조문국이 신라나 이웃한 사벌국 등 다른 고대국가와 다른, 고구려나 중국왕조 등 이질적인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배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라의 조문국 정벌이후 조문국 일부 왕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왜'(倭)를 세웠다는 전설도 있다. '일본'이전 '왜'라는 국호 자체가 조문국의 원래 국호 북왜(北倭)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 시기 일본열도에서는 왜라는 국호가 쓰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문국의 지배층은 과연 어디에서 온 어떤 집단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1세기 경 성립한 고대국가로 존재한 조문국은 사로국과 경쟁보다는 동맹관계를 맺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조문국은 백제· 고구려와 사로국 사이에 자리잡은 지리적·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인데다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신라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꽤 많이 나왔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조문국 정벌의 장수 '구도'는 신라에서 김씨(金氏) 왕조시대를 연 '김알지'의 6세손이다. 이 김구도의 아들 미추가 신라 제13대 임금이 된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조문국과 관련한 경이로운 전설을 제시한다. 김구도는 조문국을 정벌(?)한 후 조문국 공주와 혼인을 했고 조문국은 이후 경주 김씨와 혼인동맹을 맺어 김씨 왕족으로편입되었다. 옥모 홍오 아이혜 광명 내류 아로 등 조문국의 왕족들이 대를 이어 조분왕과 미추왕 실성왕 눌지왕 등 신라왕과 혼인을 맺어 '왕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라왕실과의 탄탄한 혼맥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문소(의성)지도 고지도
문소(의성)지도 고지도

◆조문국은 의성의 뿌리

조문국사적지 등의 조문국 고분군의 축성연대가 대략 5~6세기 전반까지 이어지고 있어 조문의 지배층은 그때까지도 지배력을 유지하다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통일신라시대를 여는 시기에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충북 단양에서 발견된 '신라적성비'에 있는 '추문'(鄒文)이라는 지명이 조문국의 '조문'(召文)을 뜻한다는 고고학계의 해석에 따른다면 조문국은 6세기까지 존속했다는 점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금성면 대리리를 중심으로 조성된 거대한 고분군은 <조문국사적지>로 조성돼 누구나 쉽게 찾아가 볼 수 있다.

느릿느릿 고분사이를 거닐며 산책하다보면 고분 속 잠들어있던 왕들의 영혼이 말을 걸어오는 환영에 빠져들 수도 있으니 조심하길 바란다. 사적지 한가운데에는 5월의 햇살아래 활짝 핀 작약꽃들이 조문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찬란했다. 가을 햇살에는 해바라기가 제격이다. 사적지 바로 옆에는 조문국의 전설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고분출토유물을 전시한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조문국은 사실상 의성의 뿌리다. 여전히 조문국의 비밀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언젠가 불쑥 땅 속에 묻혀있던 고대왕국 조문국의 전설과 신화가 하나둘씩 밝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탑리오층석탑
탑리오층석탑

◆ 탑리는 의성의 보물

조문국의 중심이었던 금성면소재지 탑리리는 의성의 보물같은 존재다.오래전부터 금성은 '탑리'라는 친숙한 지명으로 불렸다. 통일신라시대 대표 석탑인 '탑리오층석탑'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면소재지 중심부에서 뒤쪽으로 돌아 탑리여자중학교 바로 곁에 우뚝 솟아오른 듯 자리한 거대한 오층석탑.

석탑이면서도 전체적인 형태는 벽돌로 쌓아올린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전탑과 목조탑 양식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이런 특이한 구조로 인해 국보 제77호로 지정됐다. 높은 단층기단 위에 5층으로 쌓아올린 탑신부로 구성돼 있는데 고색창연한 자태를 자랑한다.삐뚤삐뚤한 소나무가 사방으로 석탑을 호위하듯 경계를 서고 있어 경주에 흔한 왕릉풍경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인적 드문 오층석탑의 토축 아래 핀 작약꽃들이 부처님의 가피를 상징하는 듯 해서 숙연해지기도 한다. 오래된 탑리 중심가로 발길을 돌리면 탑리와 대구를 오가는 시외버스 운행이 뜸해지면서 폐쇄되다시피 한 '탑리버스터미널'을 만난다. 이곳은 기억이 바랜 유년시절로 빠져 들어가는 타임머신같은 비밀의 통로같다.

탑리버스터미널
탑리버스터미널

66년간 이 버스정류소를 운영한 사진작가 '김재도의 사진갤러리'로 탈바꿈했지만 여전히 옛 그대로인 시골정류장 대합실 풍경이 정겹다. 긴 나무의자가 디귿자형태로 놓인 대합실엔 오래된 의성의 모습들, 하루 세편으로 줄어든 대구행 '버스운행시간표'가 보였다. 어르신들은 바뀐 버스시각을 기억하고 있다가 아들·딸이 사는 대구로 길을 나설 것이다.

논산칼국수 보리밥
논산칼국수 보리밥

탑리에선 시골장터에선 보기 드문 점심시간도 되기 전 줄을 서야 하는 보석같은 식당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식당의 메뉴는 단촐하다. 시골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보리밥과 칼국수 뿐이다. 양푼이 가득 담겨 나오는 보리밥에선 시골인심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콩나물과 오이 상추 당근 김가루에 계란후라이 하나 올린 특별한 것이 없는 그저 시골장터 보리밥인데도 감칠 맛이 난다. 바지락을 넣어 해물맛이 강한 칼국수 역시 인기메뉴다. 현금으로 계산하면 500원 할인받을 수 있는 팁(tip)은 덤이다.

'오일장'이 서는 1일과 6일 가면 의성 농민들이 직접 수확한 농산물을 사고파는 왁자지껄한 탑리장날 풍경도 볼 수 있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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