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2025의 공간 서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국립경주박물관 만찬장의 운명이었다.
이 건축은 시작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개최 도시 늑장 결정과 우왕좌왕한 위치 선정에 시간만 흘렀다. 급기야는 만찬장을 임시시설물로 허가를 득하여 속전속결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완공 시점에, 만찬 장소는 급히 보문관광단지 내 호텔로 변경되었다.
바야흐로 박물관 만찬장 건축은 '이름 없이 사라질 잉여 공간'으로 밀려날 운명에 처했다.
존재 목적 자체가 흔들리는 바로 그 순간, 하나의 탁월한 제안이 서사를 뒤집었다.
"만찬장이 아니라면, 정상회담 장소로 만들자."
극적 전환, '전화위복'의 대목이었다. 이 한마디 말이 역사적 물꼬를 트는 시작점이었다. 본래 21개국 정상이 함께하는 만찬을 위해 준비되었던 공간이 한·미 정상회담, 한·중 정상회담이라는 핵심 외교의 무대가 되었다. 사라질 뻔한 건축물이 가장 빛나는 '외교의 핵(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정치·외교에서 공간은 무대로 작동하는 일종의 메시지다.
같은 무엇도 어디에서 펼치느냐가 곧 국제적 상징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극적 전환은 건축적 가치의 재발견을 넘어 국가 외교 전략의 공간적 승리였다.
이 공간은 강성원 건축가(강희재건축사무소)가 설계한 작품으로, 한국적 목구조를 현대 기술로 재해석한 대공간 건축이다.
그 핵심 가치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목재가 만드는 '시간성의 깊이'이다. 경주는 천년 도시이다. 건축가는 이 역사성을 '난해한 개념'이 아니라 '숨 쉬는 재료'로 표현하였다. 나무는 축적된 시간의 향을 지닌 재료이며, 물성의 힘으로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는 원초적 건축재이다.
둘째, 구조가 곧 공간인 순수함이다. 건축 골격의 얼개를 그대로 드러낸 대공간은 장식보다 구조 자체가 미학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선과 면의 질서, 그 질서가 품은 따뜻한 자연의 빛은 공간 본질을 지배함으로써 품격을 높인다.
셋째, 어젠다와 상징성의 결합이다. APEC이 추구하는 핵심 의제 중 하나가 '지속가능성'이다. 목구조는 탄소 중립을 실현하는 친환경 건축구법으로, 기후 위기 시대에 책임감 있는 국가가 선택해야 할 방향성을 상징한다.
공간은 이야기로 완성된다. 이 건축물이 특별한 이유는, 탄생–보류–폐기 위기–극적 부활이라는 드라마틱한 경로를 거쳤기 때문이다. 퇴출할 운명이었기에 더욱 강렬해진 공간 서사이다. 하나의 건축물이 어떻게 '국가 외교 인프라'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되었다.
APEC 종료 후 이 건축물은 '천년미소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천년미소관은 단순한 '행사장'이 아니라, '결정이 이루어진 방'으로 남는다. 건축물이 역사적 장소로 승격하는 진면목을 목격한다.
촉박한 기간에 태동한 칠삭둥이 임시 시설물이 세계사에 그 흔적을 남겼다. 건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야기로 남을 뿐.
사라질 뻔한 공간이, 가장 주목받는 외교 공간이 되어 세계사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공간의 잠재력, 건축의 본질, 그리고 선견의 아이디어가 빚어낸 기적 같은 서사다.
천년미소관은 APEC의 현장을 넘어 미래 세대에게 전할 또 다른 '천년의 건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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