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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 답설(踏雪) - 눈을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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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대구가톨릭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이동원 대구가톨릭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남긴 이 발자국이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훗날 다른 사람의 길이 될 것이니

- 서사대사의 시 답설(踏雪) -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는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지 말라고 했다.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훗날 다른 이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구는 오래전부터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었지만, 며칠 전 병원에서 그 뜻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 병원에는 소아청소년과 소아심장학 석좌교수 한 분이 계신다. 그분은 내가 젊은 시절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로 수련하던 때의 은사님이기도 하다. 늘 침착하고 진중하며, 마치 옛 선비를 떠올리게 하는 분이다. 말수가 적고 동작은 느리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과 깊이가 배어 있다. 며칠 전 신생아실에서 그분께서 복합 심장 기형을 가진 아기의 심장 초음파 검사 하시는 것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아기 한 명을 검사하시는 데,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작은 심장의 구조물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살피셨다. 저장된 초음파 슬라이드와 동영상은 무려 280장에 달했다. 통상적인 검사에서 40~50장 정도를 확인하고 저장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양이다.

우리나라 소아심장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대가임에도,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검사를 이어가셨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확인하듯 서두르지 않았고, 어떤 구조 하나도 추측으로 넘기지 않았다. 그날의 모습에는 익숙함에서 오는 안일함이나 서두름이 없었다. 오히려 한 명의 환자 앞에 선 의사로서의 기본에 정직한 태도만이 있었다. 20여년 전, 검사를 하시던 그 모습 그대로 이셨다. 스무 해 전과 다르지 않는 그 손길을 보며, 세월은 그분을 바꾸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분에게서 소아심장학의 전문적인 지식만을 배운 것이 아니다. 환자 앞에서 어떤 태도로 서야 하는지, 생명 앞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그분이 환자를 대하는 모습에서 배웠다. 소아청소년과의 수련 과정은 흔히 도제 제도와 닮아 있다. 교과서와 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들은 교수님 곁에서 보고 함께하며 몸으로 익히게 된다. 그분은 늘 말보다 실천과 행동으로 가르치셨다.

지금, 나는 소아청소년과 교수로서 전공의를 가르치는 자리에 서 있다. 어느새 내가 누군가의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때로는 무겁게 다가온다. 얼마 전, 내가 가르쳤던 한 전공의가 전문의가 되어 병원을 찾아왔다. 그는 "지식도 지식이지만,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교수님께 배울 수 있어 감사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산대사의 시구가 다시 생각났다.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길을 따라 걷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한 걸음은 늘 조심스럽고 성실해야 한다.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누군가의 길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오래전 은사님께서 눈 위에 남겨주신 발자국을 따라 걸어온 결과일 것이다. 그 길이 조금이라도 따뜻하고 반듯한 길이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아무도 걷지 않는 눈길 위에 첫 발을 올리듯 하루를 걷는다.

이동원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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