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31일, 국회 연석 청문회장. 수백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염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럴드 로저스 쿠팡 한국 대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야간 근무가 주간 근무보다 얼마나 힘든지 몸으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저와 함께 하루 12시간 심야 배송 업무를 해보실 것을 제안합니다."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의 한국 대표에게 던져진, 누가 봐도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다. 정치적 압박이라 해석할 수도 있었고, 외교적 언어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저스 대표의 입에서 나온 답은 짧고 명확했다.
"함께 배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도 같이 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이 흘렀다. 사람들은 잊었다. 청문회장의 그 약속을, 새해가 밝고 뉴스가 쏟아지는 사이 기억 저편으로 밀어냈다. '정치적 수사'였을 것이라고, '립서비스'였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로저스는 잊지 않았다.
13일 새벽, 경기 성남 인근 쿠팡캠프 — 카메라 없는 현장 점검
3월 13일 새벽. 경기 성남 인근 쿠팡캠프. 도시가 깊은 잠에 빠진 시간, 이곳은 오히려 깨어나고 있었다. 파란색, 회색, 초록색 물류 박스가 켜켜이 쌓이고, '로켓배송', '로켓프레시'라고 적힌 상자들이 컨베이어를 타고 트럭으로 향하는 그 분주한 공간.
그 한가운데, 파란 작업복을 입은 장신의 남성이 서 있었다. 해럴드 로저스 대표였다.
화려한 수행단은 없었다. 보도진을 대동한 '보여주기식' 방문도 아니었다. 로저스 대표는 조용히 현장에 들어섰다. 트럭 적재함 앞에서 박스를 살폈고, 작업자들 사이를 걸으며 동선을 확인했다. 배송 기사들이 물건을 싣고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며, 때로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놓인 상자의 라벨을 직접 들여다봤다.
이번 방문은 19일 염태영 의원과 함께 진행할 야간 택배 체험의 '예행연습'이었다. 쿠팡 측은 "의원 체험 일정에 앞서 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안전과 운영 절차 등을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 차원의 방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담담한 설명 뒤에 숨겨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약속을 '이행'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미리 온 것이었다.
"현장을 모르는 CEO는 현장을 말할 자격이 없다"
유통업계에서 CEO가 물류 현장을 방문하는 것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장 방문은 사전에 정돈된 공간, 미리 준비된 브리핑, 사진 한 장을 위한 포즈로 끝난다. 현장의 날것 그대로를 마주하는 경영자는 극소수다.
로저스 대표의 13일 새벽 방문이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의 한국 법인 대표가 국회의원과의 체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주일 전에 사전 점검까지 나서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이건 단순한 일정 관리가 아니라, 현장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물류업계 전문가는 이렇게 평가했다. "보통 이런 체험 행사는 기업 홍보팀이 동선을 짜고 대표는 당일에 나타나면 되는 구조다. 그런데 대표 본인이 직접 사전에 현장을 밟았다는 건, 이 체험을 단순한 정치적 이벤트가 아닌 '진짜 경험'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약속이 미뤄진 두 달, 그는 무엇을 했나
사실 이 약속이 순탄하게 이행된 것은 아니다. 로저스 대표는 올해 1월 30일과 2월 6일, 두 차례에 걸쳐 경찰 조사를 받았다. 기업 대표로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법적 리스크 앞에서 약속 이행을 미루는 것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로저스 대표는 약속을 철회하지 않았다. 연기했을 뿐, 취소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 조사가 마무리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야간 배송 현장을 찾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에게 이 약속은 '처리해야 할 안건'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신의'였다는 것이다.
새벽 물류 캠프의 풍경 — CEO의 눈에 비친 것들
13일 새벽 쿠팡 캠프의 풍경은 화려하지 않았다. 콘크리트 바닥 위로 물류 카트가 끊임없이 오갔고, C1, D1이라고 적힌 구역 표시 아래 회색과 파란색 컨테이너 박스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형광 조끼를 입은 안전 관리자들이 동선을 확인하고, 배송 기사들은 묵묵히 자신의 트럭에 물건을 실었다.
로저스 대표는 그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양복 대신 작업복을, 회의실 대신 적재함 앞을 선택한 그의 모습은, 어쩌면 '경영'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경영(經營)의 '경(經)'은 '날줄', 즉 기본이 되는 줄기를 뜻한다. 기업의 기본은 현장이다. 현장을 모르는 경영은 날줄 없는 직물과 같다.
로저스 대표가 그날 새벽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숫자로만 보던 '배송 건수'가 실제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땀과 발걸음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새벽 2시의 냉기 속에서 트럭 적재함을 오르내리는 손의 감각, 수십 개의 박스를 구역별로 분류하는 눈의 피로, 어두운 골목을 헤드라이트 하나에 의지해 달리는 배송 기사의 긴장감. 스프레드시트 위의 숫자가 살아 있는 사람의 무게로 바뀌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19일, 경기도 성남 인근 — "함께 배송하겠습니다"의 완성
오는 19일, 경기도 성남 인근. 로저스 대표는 염태영 의원과 나란히 서서 야간 배송 업무를 직접 수행할 예정이다. 국회의원과 기업 대표가 같은 작업복을 입고, 같은 트럭에 올라,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노동을 하는 장면. 대한민국 유통업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물론 하루의 체험이 야간 배송 노동자들의 현실을 온전히 대변할 수는 없다. 매일 밤 그 무게를 견디는 것과 하루 체험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CEO가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가,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로저스 대표의 행보는 그 방향이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로벌 CEO의 '한국식 약속'
해럴드 로저스는 미국인이다. 한국의 정치 문화, 국회 청문회의 독특한 긴장감, 그리고 '약속'이라는 단어에 한국인이 부여하는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식 약속의 무게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청문회장에서의 공개적인 약속이 단순한 '커미트먼트'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신의(信義)'의 영역에 해당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미루더라도 취소하지 않았고, 이행하기 전에 먼저 준비했다.
어쩌면 로저스 대표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한 가지를 분명히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인에게 약속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약속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쿠팡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기업 중 하나다. 로켓배송이 만들어낸 편리함의 이면에 노동 강도와 처우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물류센터 안전 문제는 반복적으로 사회적 의제가 되었다. 이 모든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기업의 대표가, 새벽 물류 현장에 발을 디딘다는 것. 그것도 정치적 압박에 못 이겨서가 아니라, 스스로 먼저 찾아서.
우리는 종종 리더십을 전략, 비전, 혁신 같은 거창한 단어로 정의한다. 그러나 진짜 리더십은 때로 훨씬 단순한 데서 드러난다. 한 약속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먼저 준비하는 것. 그리고 현장의 무게를 자기 몸으로 느끼겠다고 나서는 것.
3월 13일 새벽, 경기 성남 인근 쿠팡캠프. 수백 개의 물류 박스 사이를 걷던 로저스 대표의 발자국 소리는 조용했다. 그러나 그 발자국이 남긴 메시지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쿠팡 관계자는"배송현장을 점검하고 현장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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