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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김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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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김치영 님.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김치영 님.

구수한 밥 냄새가 하얀 김 속에 피어올라 잠든 나를 깨운다.

평생 아침을 마련해 온 아내의 수고가 식탁 위로 고요히 내려앉는 시간이다.

꿈결 같은 운명은 예고 없이 당도한다고 했던가.

스물세 살, 생의 가장 찬란한 한 대목을 마주했던 봄날의 기억이 갓 지은 밥 냄새처럼 구수하고, 또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골목 어귀의 풍경이 빛바랜 인화지처럼 선명하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교복을 입고 사뿐히 걸어오던 그녀. 순간 동네의 번잡한 소음은 정적 속으로 잦아들고, 세상의 모든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추는 외줄기 조명이 되었다. 그 찰나, 내 남은 생은 저 빛의 궤적을 따라 흐르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청춘이 맛본 천국의 기쁨은 필연적으로 지독한 갈망을 동반하는 법이었다.

담벼락을 사이에 둔 앞집 막내딸, 모태신앙인 그녀를 향한 상사병은 날로 깊어졌다. 아침 햇살에 출렁이는 그녀의 머릿결을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동네 놀이터를 서성이는 고행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병증을 진작에 눈치채셨다. 무심했던 반상회에도 주일 미사에 가듯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참석하셨고, 그녀의 어머니가 빗질하는 골목길을 함께 쓸며 소리 없는 조력자가 되어주셨다.

나는 밤마다 성모께 빌 듯 간절한 문장들을 적어 내렸다. 내가 짊어진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함께 지자는, 참으로 무모한 청혼서였다. 편지의 끝머리엔 늘 '내 탓이요, 내 큰 탓이요, 내 크나큰 탓이로소이다'라는 기도를 뻔뻔하게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선량함을 가장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요였을지도 모른다. 그 간청이 닿았는지 이듬해 가을, 기적처럼 두 번의 혼례를 치렀다. 전날의 정결한 혼배성사와 이튿날의 떠들썩한 예식,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 벅차던

'앞집 처자'는 그렇게 나의 반려가 되었다.

그 후로 마흔일곱 해, 아내는 갯벌의 소금처럼 제 몸을 녹여 집안의 간을 맞추어 왔다. 아이들의 해진 양말 코를 꿰매고, 남편의 고단한 어깨 위로 쏟아지는 세상의 궂은비를 함께 맞으며 집안에 온기를 채워나갔다. 소금이 미역에 닿아 생기를 불어넣고 배추에 닿아 숨을 죽이듯, 아내는 상황에 따라 자신을 낮추며 가족을 보듬었다. 남편의 박봉을 쪼개어 가계부를 채우고, 시부모의 병시중을 묵묵히 감당해 내는 사이, 아내의 손마디는 어느새 투박해져 있었다.

밥을 풀 때면 아내는 늘 내 공기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윗부분을 꾹꾹 눌러 담고, 본인은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을 긁어 담곤 했다. 주걱이 솥 바닥을 긁어내며 내던 그 마찰음은,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담아내는 변주곡이었다.

젊은 날의 사랑이 타오르는 불꽃이었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은 은은한 달빛 아래 고요한 정원과 같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으며, 나란히 늙어갈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이 생의 막바지에 누리는 가장 절실한 축복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며칠 전, 아내에게 문득 물었다.

"여보, 요즘도 전기밥솥에서 내 밥부터 먼저 푸오?"

아내는 대답 대신 예전의 질문을 장난스레 되물어왔다.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

나는 잠든 아내의 머리맡에서 나직이 대답을 대신한다.

'밥 푸는 순서대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그 해묵은 속설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보는 것이다.

"그래, 제발 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덧붙인다. 내가 먼저 죽고, 혹여 다시 태어난대도 당신과 결혼은 하지 않겠노라고. 그저 당신의 먼발치에서 바람으로 머물며 당신의 고단한 이마를 닦아주고 싶다고. 나라는 짐을 지고 묵묵히 거친 여울을 건너와야 했던 당신의 고단한 세월을 차마 다시 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이기적인 사내를 만나 꽃 같던 청춘을 다 바친 당신에게, 내세만큼은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위한 화려한 생을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잠든 아내가 꿈을 꾸는지 콧등을 찡긋한다.

젊은 날, 편지 끝에 치기 어린 마음으로 적어 내려갔던 '내 탓이요'라는 고백은 반백 년이 흐른 지금에야 가슴 저미는 회한으로 돌아온다.

내일 아침도 어김없이 하얀 김 속에 피어오른 밥 냄새가 나를

깨울 것이다. 그 온기 속에서 아내가 꾹꾹 눌러 담은 평생의 헌신을 기억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나직이 읊조려 본다.

"그러니 부디, 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당신은 조금 더 천천히,

이 세상 맘껏 누리다 오세요."

그리하여 아내가 눈물로 비워낸 내 삶의 빈 공기 위로, 따스한 밥 냄새가 그리움처럼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아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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