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삶의 셈판/ 김구섭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김구섭 님.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김구섭 님.

여름이 땅을 삼킬 듯 달아오른다. 지열은 아지랑이가 되어 발목을 휘감고, 나무들은 가지마다 지난 시간의 무게를 눅눅하게 매달고 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먼지와 지글거리는 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친다. 그 질박한 냄새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소란스러운 반야월 장터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간다.

사람의 체온과 흙먼지가 뒤섞인 이곳은 거대한 삶의 셈판이다. 난전 한편에서 토란 줄기와 콩잎을 파는 아지매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외친다.

"보이소 마!"

"이거 억수로 헐타 아이가! 한 개 천 원, 두 개 가가도 천 원 이라카이. 단디 보소, 요래 싱싱한 거 어디 가가 사겠노?" 흥정의 덤을 얹어주는 그 투박한 사투리는 자로 잰 상술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넉넉한 보태기다.

삼십여 년간 경영컨설팅과 세무 현장을 오가며, 소수점 아래 숫자 하나에 기업의 운명을 걸었던 경영지도사로서 사는 삶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1원 한 장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사무실의 서늘한 형광등 아래서 보면, 이곳의 계산법은 논리가 무너진 균열처럼 보인다. 그 균열 사이에서 평생 신봉해온 '정확함'이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문득 깨닫는다. 타인의 기업에는 냉철한 메스를 들이대며 생의 숫자를 기입해 왔건만, 정작 '나'라는 이름의 기업에 대해서는 늘 진단 불능이었다. 난전의 낡은 저울추가 허용하는 따뜻한 오차야말로, 우리가 놓치고 살아온 삶의 핵심 자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국밥집의 찌그러진 양은 냄비와 묵은 주전자는 고단한 세월의 흔적을 훈장처럼 품고 있다. 푸근한 국물 속 고기 한 점과 막걸리 몇 잔에 가슴은 금세 달큰해진다. 유년의 고향 장날이면 괜스레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설레곤 했다.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와 약장수의 걸쭉한 입담이 공중을 떠돌던 그 길목에서, 나는 세상을 향한 첫 재무상태표를 작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곳은 장터 깊숙이 마련된 가축시장이다. 비릿한 냄새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새 주인을 기다리는 짐승들을 보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진다. 우리 집안의 재산 1호이자 아버지의 유일한 벗이었던 조랑말을 내다 팔던 날, 마구간의 빈 마차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가 끌고 간 그 말의 뒷모습은 내 유년의 장부에 기록된 첫 번째 결손이었다.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빈 페이지가 남았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생명이 지폐 몇 장의 값으로 매겨지던 그 순간, 어쩌면 그날의 장터는 내 유년이 처음 손익을 계상하던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이익이 곧 상실되고 손실이 도리어 그리움이라는 자산으로 치환되는 인생의 복식부기를 나는 그렇게 장터의 먼지 속에서 처음 배웠다.

고개를 들어 장터 뒤편으로 묵직하게 솟은 초례봉을 올려다본다. 공산전투에서 대패하여 쫓기던 고려 왕건이 하늘에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일어설 힘을 가늠하던 자리가 아니던가. 천하를 꿈꾸던 영웅에게도 군사를 다 잃고 홀로 남은 그 절벽 끝은, 존재의 밑천마저 바닥난 거대한 생의 자본잠식 상태였으리라. 나 역시 인생 장부에 붉은색 '적자'가 선명했던 고비마다 그 봉우리를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왕건에게 초례봉은 패배를 기록하는 마침표가 아니라, 다음 기로 넘어가는 '희망의 이월 항목'이었다.

낡은 대구선 기차의 쇳내 섞인 숨결이 멈춘 자리엔 차가운 아파트 숲이 들어찼다. 익숙했던 둑길의 곡선 대신 수직으로 솟구친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이방인처럼 서성인다. 그 건조한 도시의 끝자락, 이름마저 역설적인 '안심요양병원'에 어머니의 구순(九旬)을 부려놓았다. 유리창 너머의 뒷모습은 이제 더 이상 연근을 캘 수 없는 밭이랑의 끝처럼 적막하다.

반야월의 검은 흙 속을 헤집던 어머니의 옹이진 손마디는 자식들의 인생을 평탄하게 다져준 고귀한 노무였다. 진흙투성이인 그 옷자락을 보며 자란 나는 성공이란 말끔한 정장과 반짝이는 명함 속에서만 얻어지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수많은 기업의 바닥을 훑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머니의 생은 자식이라는 열매를 키워내기 위해 당신의 연골을 밑천으로 내어준 삶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감가상각할 것조차 남지 않은 마른 등이야말로, 평생 분석해 온 어떤 장부보다 더 정직한 생의 최종 결산서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여러 겹으로 접힌 비밀 장부와 같다. 사람들은 더하기와 곱하기로 주머니를 채우길 원했고, 빼기 앞에서는 허전해했으며, 나누기 앞에서는 제 살을 떼어내는 일처럼 망설였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저울추를 옮기듯 타인의 성공과 실패를 계산하며 살아왔다. 끝내 남은 결론은 하나였다. 인생의 가장 큰 균열은 언제나 장부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 시작된다는 점이다. 채울 것 없는 완벽함은 더 이상 나아갈 동력이 없는 경영의 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 안심의 땅을 뒤로하며, 나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수익이 주머니의 무게가 아님을 깨닫는다. 꽉 찬 보름달보다 채울 여지가 있는 반야월(半夜月)의 반달처럼, 우리네 삶은 그 부족한 여백이 있을 때 더욱 역동적이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 초례봉처럼 단단한 믿음과 타인을 향한 진심만이 삶의 셈판 위에서 마지막까지 값진 무형자산으로 남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나는 장터 한복판에서 낡은 저울 위에 마음 한 조각을 슬며시 올려본다. 수치는 엉망이고 무게는 한없이 가볍지만, 이 삐딱한 저울이야말로 내가 삼십여 년의 세월을 돌아 도달한 가장 정직한 결산이리라.

어머니를 모셔둔 안심이라는 이름의 땅은, 끝내 자식인 내게도 한 생의 안심을 내어주었다. 장마당의 소란 속에서 나는 비로소 고요한 안심(安心) 하나를 장부 끝에 적어 넣는다.

인생이라는 긴 경영의 장부에, 오늘 다 소진하지 못한 희망은 내일의 장부로 이월하리라.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무섭노' 발언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며 전체주의적 검열 사회를 경고했다. 해당 발언은 리센...
미국과 이란 간 전쟁 직후 담합을 통해 유가를 폭등시킨 혐의를 받는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 직원들이 기소되었다. 서울중앙지검에 따르면,...
광주 군 공항 부지에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정부 발표에 대해 대구경북 지역의 실질적인 지원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며, TK...
캐나다 정부가 차세대 잠수함 도입 사업에서 독일의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TKMS)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으며, 사업 규모는 최대 60조 원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