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곡을 조금 살까 해서 쌀집 안으로 들어선다. 은빛으로 여문 쌀알 속에서 긴 계절의 향기가 난다. 감자즙 내음 같고 시골 부엌의 공기 맛도 느껴진다. 됫박으로 쌀을 휘저을 때 쌀알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작은 마찰음까지, 얼마만 인가, 공감각적인 기억이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정미소 옆 나지막한 쌀집이 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드러난 낡은 서까래가 빗살처럼 줄지어, 오랜 세월의 무게를 떠받쳐 왔다. 지난 시간의 막이 겹겹이 쌓인 양철 간판은 한때 진했을 글씨가 희미하게 바랬다. 가게 한가운데 뒤주와 됫박, 저울이 자리를 지키고 쌀자루는 무거운 순서대로 벽을 따라 층층이 기대어 있었다.
뒤주에는 쌀이 작은 동산처럼 쌓여 있었다. 되를 쌀 속으로 찔러 넣으면 알곡이 작은 파도처럼 갈라지며 자리를 바꾸었다. 공기가 빠져나간 틈을 쌀알이 다시 채우고, 됫박 가장자리에 걸린 알갱이는 흔들어 평평하게 골랐다. 살살 다루어도 쌀이 수십 알 튀어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쌀알은 톡톡 마침표를 찍으며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굴렀다.
됫박이 가득 찼을 때, 주인아저씨가 양손으로 쌀을 끌어올려 고봉을 세웠다. 그대로 자루에 담아주면 좋겠는데, 아저씨는 옆에 둔 둥근 막대기를 들고 됫박 앞쪽 가장자리를 따라 수평으로 쓱~ 밀었다. 순간 쌀 봉우리가 허물어졌다. 넘친 쌀을 깎아내리니 야박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평미레가 됫박 끝까지 가지 않고 멈추었다. 정량을 맞추는 자리까지 깎아내리지 않았다.
됫박 위의 쌀을 밀 때, 주인아저씨의 손끝은 사람의 사정과 정을 함께 헤아리는 마음의 눈금처럼 보였다. 단골인지, 먼 길을 온 사람인지, 아이 심부름인지에 따라 달라졌다. 손님을 바라보는 각도 차이가 평미레가 멈춘 덤이었다. 평미레는 단순히 쌀을 고르는 막대가 아니었다. 가난한 시절을 함께 살았던 인심의 높이를 가늠하는 도구였다.
평미레가 멈춘 자리에 남은 쌀 한 줌은 덤이 된다. 그 안에는 우리가 단순히 사고파는 관계가 아님을 말해주는 무언의 언어가 담긴다. 저울은 무게를 재지만, 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이를 잰다. 덤은 계산서 위에 적히지 않는 마음이며, 서로의 체온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높이였다.
평미레는 수평으로 민다. 누구에게나 같은 양이 돌아가도록 공평하게 잰다. 하지만 누군가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조금 더 얹어 준다. 이 차가운 불공평이 오히려 관계를 더 따뜻하게 데운다. 인심은 조금 기울어진 자리에서, 조금 넘친 쌀알 위에서 봉긋하게 도드라진다. 평미레의 셈법은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형이상의 언어다.
젊은 시절 나는 막걸리를 자주 마셨다. 그런데 막걸리를 담은 주전자 밑부분이 안쪽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이윤을 얻으려는 오목한 굴곡은 얄팍한 욕망의 표상처럼 보였다. 안으로 찌그러진 주전자는 이윤을 향해 접힌 마음의 형상이고, 멈춰있는 평미레는 인심을 향해 남겨둔 여백의 형상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평미레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쪽이었다. 부족해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해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았고, 사람을 대할 때도 옳다고 여긴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야박하게 인간관계의 가장자리까지 깎아내지는 않았는지. 평미레를 미는 주인아저씨 그 멈춤의 함수를 다시 계량해 본다.
사람의 마음은 평미레로 잴 수 없다. 고마움의 온도, 미안함의 깊이, 기다림의 길이, 관계의 따뜻함, 용서의 크기와 그리움의 무게 같은 것들은 됫박에 담거나 저울에 올리지 못한다. 어떤 순간은 같은 시간이라도 마음에 따라 길이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에는 늘 더하기 빼기로 계량되지 않는 영역이 실재한다.
요즘 세상을 재는 도구는 정확하다. 먼지 하나의 부피도 나노 단위로 재고 저울도 원자까지 잰다. 마트에 가도 모든 것이 더도 덜도 없이 포장되어 있다. 사고파는 데 정 情이라고는 없다. 단지 거래하는 관계일 뿐.
이 아쉬운 회상 너머로 판단보다 헤아림을 먼저 두는 마음의 평미레를 가진 사람이 문득 그리워진다. 공평을 유지하되 야박하지 않고, 여분을 남기되 흐트러지지 않는 균형을 지닌 막대기처럼 숫자보다 정을 나눌 수 없을까.
평미레를 하나 깎아 책상 위에 얹어둘까, 이제 나는 박하게 깎아대는 삶에서 벗어났다. 누구에게나 한 줌의 여유를 남겨주는 영역을 지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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