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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먼 길의 연대기(年代記)/ 김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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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김창남 님.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김창남 님.

<아직 아흔도 아닌데>

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온다.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로 내가 제사를 맡은 지 3년째다. 아버지가 여든아홉의 생을 접으신 지 어느덧 열두 해,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지만, 제삿날 짙은 향내 속에서는 여전히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 만져질 듯 선명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석 달 남짓 누워 계셨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서 지냈고, 마지막 순간도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비교적 평온하게 돌아가셨다. 다만 임종을 앞두고 남긴 그 한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내가 아직 아흔도 안 됐는데 벌써 왜 이러냐?"

그 말은 투정처럼 들렸지만, 실은 생을 끝까지 붙들고 싶은 항변에 가까웠다. 평생 결정을 미루지 않던 분이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잠시 어린아이 같았다. 그 눈빛에는 끝내 놓고 싶지 않은 삶에 대한 집착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한 가지 질문이 따라온다. 가진 것 하나 없던 시절, 거센 세파에 부딪힐 때마다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리던 그 과단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낙천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속으로는 늘 계산하고, 혼자 생각에 잠기는 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선택의 순간이 되면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이제야 그 까닭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결단은 무모함이 아니라 책임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책임은 언제나 가족을 향해 곧게 뻗어있었다는 것을.

<십 리 길, 책보를 멘 소년>

1925년 음력 1월 17일, 아버지는 금릉군 감천면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손위로 백부와 고모 두 분, 아래로 고모 한 분으로 다섯 남매 중 차남이었다.

집안 형편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농토라고는 손바닥만 한 밭떼기 하나뿐이었다. 거기서 나오는 수확물로는 열 식구 끼니는커녕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조차 서로 다투는 형편이었다. 생계는 소작농으로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이 벌써 한 사람의 농사일을 감당하고 있는 형편에서 아버지마저 같은 삶을 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열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시내에 있는 김천보통학교(4년제)에 보내기로 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시골에서는 형편이 조금 나은 집에서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마을에서 아버지만 유일하게 학교에 다녔다. 십 리가 넘는 길을 혼자 오가야 했다. 이른 아침 책보를 둘러메고 산길을 걸어가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이면 발이 얼어 걸음을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돌아서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보통 분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도회지로 나가라."

아버지에게 전한 이 말은 유언처럼 남았다.

농사는 형 하나로 족하기도 하고, 늘품이 없으니 다른 길을 찾으라는 뜻이었다. 물려받을 땅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기에, 그 말은 위로이면서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그렇게 살았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머리가 참 좋았다고, 보통학교 선생님도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사정을 알고는 무척 아쉬워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보통학교라도 다닌 덕분에 한자가 많은 신문도 무리 없이 읽었고, 일본어 또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 뒤, 열다섯 되던 해, 아버지는 아버지를 잃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맏형인 큰아버지가 가장이 되었다. 큰아버지는 아버지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았고, 이미 결혼해 딸 둘을 두고 있었다. 가장이 된 큰아버지의 어깨는 무거웠고, 집안 형편은 더 팍팍해졌다. 할머니와 형제들, 거기에 조카 둘까지 열 명이 넘는 식구를 소작농 수입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머슴살이할 마음도 없던 아버지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시내에 있는 자전거방에 취직했다. 자전거를 팔거나 고치는 그곳은 월급 대신 숙식을 제공하며 기술을 익히게 하는 자리였다. 보통 십 년 정도 일하면 인근에 자전거방을 차려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물 한 그릇의 혼례>

자전거방에서 일한 지 사 년째 되던 해, 전쟁은 끝을 향하고 있었다.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조선의 젊은이들은 학도병과 징병, 징용으로 끌려갔다. 고향마을에서도 여럿이 끌려갔고, 어떤 이는 심부름을 가다 순사에게 붙잡혀 부모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징집이 머지않았다는 말을 들으며 아버지는 어떤 밤을 보냈을까. 겉으로는 담담했겠지만,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마음속은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고민도 깊어졌다. 이 회오리에 휘말려 당신의 아들도 차출될 것만 같은 불안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2대 독자로 이어진 할아버지에게서 대가 끊길까 두려웠다. 맏아들인 큰아버지에게는 딸만 있었고, 작은아들마저 군에 끌려가면 돌아올 보장이 없었다. 군에 가기 전에 혼인이라도 시켜 손을 보고 보내야겠다고 요량했다.

혼인이 서둘러졌다. 고모부의 중매로 김천시 남면 운곡리에 살던 열다섯 살 어머니와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여성들 또한 정신대에 끌려갈 위험에 놓여 있었다. 1944년, 전황이 급속도로 나빠져 종군위안부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여자정신대挺身隊근무령'을 공포하면서 열두 살이 넘은 처녀와 젊은 과부들이 우선 대상이 되었다. 결혼한 여성만이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어머니 쪽에서도 사정이 급했다. 딸을 지키기 위해 혼인을 서둘렀다. 양가의 다급한 형편이 맞물려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고모부와 함께 선을 보러 어머니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고모부가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던 처녀를 가리키며 "저 아이"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첫눈에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이는 고모부도 말씀하셨고, 어머니에게도 몇 번 들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마음이 놓였다는 그 한마디가 내 머리에 오래 남았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어머니는 일본 말을 술술 하던 아버지에게서 믿음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워낙 절박한 상황이라 양쪽 집안이나 당사자 모두 이래저래 따질 여유가 없었으리라.

그해 팔월, 맞선을 본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다. 전쟁 중이어서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절을 올리는 것으로 혼례를 대신했다. 첫날밤은 외가에서 지냈고, 이튿날 시댁이라고 왔지만 비어 있는 방이 없어 신혼부부의 하룻밤을 할머니 방에서 보냈다. 사흘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다시 자전거방으로 돌아가고,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기거했다.

며칠 뒤,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그날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징집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마른 가슴을 쓸어내렸다. 살아남은 안도감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동시에 밀려왔다.

한 달쯤 뒤 자전거방 주인은 가게 한쪽에 작은방을 하나 내주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첫 살림을 시작했다.

주인은 아버지를 친아들처럼 대했다.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준 은인이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그 배려는 큰 힘이 되었다. 훗날 아버지가 그분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은인을 말할 때의 공손함이 그 안에 배어있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에게 중요한 순간마다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손길은 우연이 아니었다. 성실하게 일하고 신의를 지키며, 등을 돌리지 않았던 태도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살아오며 받았던 여러 번에 걸친 주위의 도움도 아버지의 그런 삶에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역 광장에서 웅크린 희망>

결혼과 해방은 아버지에게 한꺼번에 책임을 안겼다. 이듬해 팔월 형이 태어났다. 할머니는 마침내 대를 이었다며 빨간 고추를 단 금줄을 대문에 직접 내다 걸었다. 기쁨은 컸지만, 그 기쁨만으로는 살림이 굴러가지 않았다.

월급도 없는 자전거방 일은 숙식만 해결되었지 돈은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형을 품에 안고 돌아앉은 밤, 아버지는 오래 고뇌에 빠졌다. 가장이라는 의미는 밥을 벌어야 한다는 뜻임을 깨달았다.

그 무렵 인생을 바꿀 일이 찾아왔다. 자전거방 주인의 친척이 서울에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고 있었다. 주인은 그 분에게 성실한 젊은이가 하나 있는데 사람됨은 자신이 보증할 테니 숙식하며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며칠 뒤, 그쪽에서도 사람이 필요하다며 보내라는 답장이 왔다.

서울행, 말은 쉬웠지만, 어린 아내와 갓난아이를 둔 가장에게는 이만저만한 모험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며칠을 두고 고민했다. 실패하면 이 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대로 머물면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떠나기로 했다. 오래 망설인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대를 이어야 할 손자를 험한 서울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할머니는 형을 두고 가라고 말렸다. 젖도 제대로 떼지 못한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는 밤,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천장만 쳐다보았다.

밤 열차에 몸을 실었다. 옷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어머니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늠하지 못했지만, 그저 아버지만 믿고 따랐다고 했다. 그 말속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던 시대의 체념이 함께 들어 있었다.

서울역에 내리자 낯선 공기가 훅 밀려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역 광장 한쪽에 앉혀두고 일하게 될 정비공장을 찾아 나섰다가 몇 시간이나 지나서야 돌아왔다.

그 몇 시간 동안 어머니는 사람들 틈에서 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훗날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 장면을 떠올려 보면 내 가슴도 철썩 내려앉았다.

정비공장에서는 궂은일을 도맡는 수습공 자리를 내주었다. 사장의 배려로 골방 하나가 주어졌다. 어머니는 수리공들의 식사를 챙기는 조건으로 함께 머물 수 있었다. 신혼의 단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지만 그 방에서 다시 치열한 삶이 시작됐다.

<또 한 번의 선택>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 기술을 빨리 익혔다. 김천에서 배운 자전거 수리 기술이 큰 도움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붙임성 있고 성실하게 일하니 사장이 아끼고, 손님들도 신뢰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비공으로는 한계가 보였다. 월급은 오르겠지만,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본이 있어 공장을 차릴 형편도 아니었고, 자전거방처럼 오래 일했다고 분가시켜 줄 리도 없었다. 고향 할머니께 맡겨둔 아이는 자라고 돈은 늘 모자랐다.

또 한 번 결정을 내려야 했다. 운전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수리공은 차의 뒤를 보지만 운전사는 차의 앞, 길을 본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운전은 쉽게 배울 수 없었다. 요즘처럼 운전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수리가 끝난 차를 찾으러 오는 손님들에게 머리를 숙여 가르침을 청했고, 정비가 끝난 자동차의 시험 운행을 핑계 삼아 몰래 연습도 했다. 마침내 운전면허를 따냈다. 그 어려운 운전을 그런 방식으로 배웠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사장은 공장이 생긴 이래 수리공이 운전면허를 딴 것은 처음이라고 했단다. 그날 아버지는 기쁘기도 했지만 새로운 길을 나서야 한다는 부담으로 가슴이 무거웠다. 아버지의 그 선택은 결국 길을 열게 되었다.

<마이크로버스의 황금기>

서울에서는 16인승 마이크로버스가 시내버스 역할을 하던 때였다. 아버지는 정비공장에서 알게 된 차주의 소개로 버스회사에 취직했다. 그 시절 운전사는 귀한 직업이었고 수입도 좋았다. 버스 요금은 운전사가 직접 받았다. 어머니 말로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호주머니에는 늘 돈이 꽉 차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흥청거리지 않았다. 번 돈은 어머니가 알뜰하게 저축했다.

이태 만에, 사채를 보태 버스를 한 대 장만했다. 이제는 남의 차가 아니라 당신 차였다. 수입은 배로 늘었다. 서울에 집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고향에도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형과 세 살 터울로 누이가 태어났고, 이어서 나도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고향에 있던 세 살 아래 막내 고모도 불러 경찰서 임시직원으로 취직시켰다. 고모는 머리가 좋아 야학에 보내 글을 깨치게 했다. 같이 근무하던 직원 중에 인물도 훤하고 부지런한 고모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는 이도 있었다.

비록 몇 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집안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때가 살아오면서 가장 평온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행복한 시절이었으리라.

하지만 아버지는 마냥 들떠 있지 않았다. 차 한 대에 온 재산이 묶여 있었고, 사고라도 난다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었다. 결정은 길을 열었지만, 그 길은 언제든 끊어질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 길을 가로막는 일이 닥쳤다. 6·25전쟁이 터졌다.

<탈영, 돌아오기 위한 도주>

아버지의 대응은 빨랐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어머니를 고향 김천으로 피난 보냈다. 사람 목숨이 먼저라며 뒤처리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열차 안에 자리가 없어 간신히 지붕에 올라탔다고 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돌도 지나지 않은 누이를 치마 속에 넣고, 어머니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굴을 빠져나오면 증기기관차의 매연은 사람들 얼굴을 새까맣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루 꼬박 달려 김천에 도착했다.

피난길의 고생 때문이었는지 누이는 돌을 갓 지난 뒤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는 그 사실조차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한강 다리가 끊기면서 아버지는 서울에 남겨졌다. 버스회사 직원들은 모두 떠났고, 주인 잃은 버스들만 차고지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주인도 세입자들도 모두 떠난 빈집에 홀로 남아 피난 갈 방법을 찾고 있던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운전사가 귀하던 시절이라 서울 지리에 밝은 아버지는 의용군 부대장 차량을 몰게 되었다. 운전 기술 덕분으로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매일 전선을 오가는 길 위에 서 있었다. 버스는 징발되었고, 집 주인 마저 피난 가버려 전세금도 돌려받지 못해 전 재산이 사라졌다. 서울에서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던 아버지의 황금기는 여기까지였다.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뒤집혔다. 서울 수복이 임박했고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경찰서도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어 막내 고모는 후퇴하는 경찰들과 함께 이북으로 가버렸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고모와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고모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1983년 KBS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방영되며 전국적으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몇 차례나 막내 고모를 찾기 위해 신청했지만, 접수되었다는 통보만 올 뿐 소식은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히며, 아마도 북한에서 결혼해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자신을 달랠 뿐이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도 부대의 후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점점 숨이 막혀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그때였다. 죽음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다.

황해도 어느 산골 마을 민가 마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부대가 잠시 쉬게 되었다. 군인들은 피로에 젖어 담배를 물고 느슨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 틈을 보았다.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버지는 산 쪽으로 걷는 척하다가 이내 내달렸다. 등 뒤에서 언제 총성이 터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목덜미를 죄었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다리가 풀릴 듯 떨렸다. 넘어지면 끝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고향에 있을 가족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을 뛰다 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탈영병이 생겨도 후퇴가 더 급했던 탓인지 아무도 쫓지 않았다.

산속에서 사흘을 버텼다. 낮에는 숨어있고, 밤이 되면 별을 보며 남쪽을 가늠했다. 배가 고파 나뭇잎을 씹어보기도 하고, 산골짜기 물을 손으로 떠 마셨다. 밤이면 바람 소리도 사람 발자국처럼 들렸다. 누군가 뒤따라오는 것 같아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눈을 감으면 가족 얼굴이 떠올랐고, 눈을 뜨면 어둠뿐이었다. 그 사흘은 한 생애처럼 길었다.

인민군이 두려워 마을로 내려오지 못하고 산길만 택하다 보니, 배가 고파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죽든 살든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마을로 내려가기로 했다. 산자락 초입에서 초가집 몇 채가 보였다. 마당에서 군인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유엔군이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다가갔다. 북한군 복장을 본 군인들이 총을 겨누었다. 아버지가 배고프다는 손짓을 했더니 누군가 빵 두 개를 주었다. 두 손으로 움켜쥐고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본 다른 병사는 불쌍해 보였는지 우유와 비스킷을 건네주었다.

그 순간 아버지는 살았다.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후송되었다. 유엔군을 만났다는 것은 험한 고비를 넘겨온 아버지를 살아남게 해준 하나의 행운이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때 그대로 이북으로 갔으면 너희들하고는 영영 이별이었을 것"이라며 몸서리를 치곤 했다.

<포로수용소 생활>

포로수용소 생활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말을 아끼셔서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십여 년 전 관광지로 바뀐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찾았을 때, 나는 그 시절 아버지의 삶을 더듬어보았을 뿐이다.

그곳에서 사상의 갈등은 총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포로들은 반공과 친공 둘로 나뉘었다. 중간은 없었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잘못 서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아버지는 망설이지 않고 반공 편에 섰다. 사상을 고른 게 아니라,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아버지 곁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글을 모르는 이의 편지를 대신 써주고, 몸이 아픈 사람을 돌보아 주었다. 이념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했다.

몇몇 수용소는 반공 세력이 장악해 태극기를 게양했고, 이에 맞서 또 다른 수용소들은 친공세력이 장악해 인공기를 내걸었다. 피를 부르는 사상전쟁은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막사 안에서는 밤마다 긴장이 감돌았다. 누가 어느 편인지, 마음속 생각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반공포로들은 북한 송환을 거부했고, 친공포로들은 북한 송환을 원했기에 이들의 충돌로 유혈사태가 잦았다. 친공세력이 장악한 막사에서는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거제도 앞바다에 시신이 떠다닌다는 소문도 돌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반공 세력이 장악한 막사에 배치되어 국방군 경비대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그 위험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그럼에도 하루하루가 숨을 죽여야 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오직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

아버지는 장기를 잘 두었다. 수용소에서 장기 대회가 열렸다. 2등을 했다. 부상으로 일제 안전면도기를 받았다. 아버지는 그 면도기를 오래도록 애지중지하며 사용했다. 가끔 거울 앞에서 면도하는 모습을 볼 때면 수염을 민다기보다 면도기를 사용하기 위해 면도를 하는 것 같은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 작은 물건은 비참한 시절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증표였을 것이다.

한번은 어머니가 면회를 갔다. 나를 업고 갔다고 했다. 처음에는 업힌 나를 보고 죽은 누이인 줄 알았단다. 누이가 세상을 떠난 것과 내가 태어난 것을 처음 듣고 아버지는 말문이 막혔었다고 훗날 어머니가 그때를 돌아보며 말했다.

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조치로 풀려났다. 한밤중에 부산 부두에 내려주며 각자 알아서 가라고 했다. 자유였지만 막막한 자유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것이 있었다. 끝내 북으로는 끌려가지 않았다는 것, 결정의 순간마다 아버지는 돌아올 길을 선택했다는 것, 그 선택이 우리를 남겼다.

<다시 일어서다>

부두를 어슬렁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불심검문에 걸렸다. 헌병대에 연행되어 며칠간 조사를 받았다.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는 진술을 반복해야 했다. '별다른 혐의는 없다.'고 했지만, 전시 중이었고 군에 가야 할 연령대라는 이유로 다시 국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또 군복이라니 그러나 내색할 수 없었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또 견뎌야 했다.

헌병대장은 사회에서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 버스 운전사였고, 의용군 시절에는 지프차를 몰았다고 대답했다. 마침 헌병 대장의 운전병 자리가 비어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다시 운전병이 되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총 대신 핸들이 손에 쥐어졌다.

아버지의 부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군 생활은 비교적 수월했다. 몸이 편해질수록 마음은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다. 밤마다 가족 생각이 밀려들었다.

헌병대장은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장교로 임관한 뒤 줄곧 헌병대에서만 근무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얼른 고향으로 가야지." 하며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조금만 참으면 곧 전쟁이 끝날 거라며 위로해 주기도 했다.

53년 7월 휴전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다녀왔다. 할머니를 뵙고 할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렸다. 어머니와 지낸 사흘, 그 짧은 시간이 꿈처럼 흘렀다.

그 무렵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유기그릇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았다. 그릇이 너무 무거워 고개가 빠질 듯했지만, 큰집에 얹혀사는 처지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몸부림이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조금만 더 참아. 곧 데리러 올게."

애틋한 마음에 말로나마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언제 제대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잔치를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살아 돌아온 아버지가 신기한 듯 인사하러, 구경하러 몰려왔다. 아버지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전사한 또래 청년들의 부모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시선 앞에서 아버지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을 터였다.

부대로 돌아온 뒤, 아버지는 점점 의욕을 잃었다. 가족을 보고 온 뒤의 부대 생활은 이전과 달랐다. 마음은 항상 고향에 가 있었다.

사정을 알게 된 헌병대장은 이를 딱하게 여겨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의무부대를 찾아갔다. 마침, 의무대장은 헌병대장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보름 뒤 아버지는 자신의 병명도 모른 채 의무대에 입원했다.

형식적인 검사가 몇 차례 이어졌고, 한 달쯤 지나 의병 제대 특명이 내려왔다. 아버지는 인생에서 고비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가는 힘을 지녔고, 헌병대장처럼 늘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제대 후, 헌병대장의 주선으로 부산의 한 택시회사에 취직했다. 택시는 당시 고급 교통수단이었다. 하루 수입 가운데 일정 금액을 회사에 내면 나머지는 운전사의 몫이었다. 일한 만큼 벌 수 있는 구조였다.

아버지는 잠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일만 했다. 주차장 구석 판잣집에서 지내며 돈을 모았다. 두 해쯤 지나 그제야 어머니와 나를 부산으로 불렀다. 내가 여섯 살 때였다.

형은 학교에 다니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아버지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 데려가라고 막아섰다. 그 무렵 큰집에서는 큰어머니가 또 딸을 낳았다. 할머니는 형을 데리고 있다가 아들 없는 큰집에 양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금 더 두고 보자며 형을 두고 부산으로 왔다.

산 중턱 셋방살이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희망이 보였다. 전기는 밤에만 들어왔고 그마저도 전기요금이 밀려 자주 끊겼다. 그래도 시골에서 호롱불 아래 살던 내게 전기와 석유램프는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웃으면서 살았다.

택시 일은 수입이 좋았다. 아버지는 서울에서처럼 이번에도 모아놓은 돈과 사채를 보태 택시를 한 대 장만했다. 고용 운전사에서 차주 겸 운전사가 되자 수입은 눈에 띄게 늘었다.

셋방살이 2년 만에, 인근에 작은 주택 하나를 장만했다. 그 사이 여동생이 둘이나 태어났고, 4학년이던 형도 데려왔다. 큰어머니가 또 딸을 낳아 할머니 걱정은 더 심해졌지만, 아버지는 도시에서 공부시켜 보내겠다며 할머니를 설득했다. 가족이 다 모였다. 나도 형과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는 내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지는 여유가 생기면 고향의 큰아버지에게 돈을 보내 논을 사두었다. 여동생에 이어 남동생이 또 태어나 우리는 오 남매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부자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생활에는 꽤 여유가 있었고, 행복한 유년 시절이었다.

형은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고, 선생님은 부산에서 제일 어렵다는 경남중학교에도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했다. 나 역시 공부는 그럭저럭하는 편이어서 부모에게 별다른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비록 달동네였지만 동네에서는 손꼽히는 살림이었다. 아버지는 먹거리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밥상에는 생선 반찬이 늘 올라왔고, 석쇠에 고기를 자주 구워 먹었다. 나는 지글거리는 냄새를 언제까지나 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대가 끊길까 노심초사하시던 할머니는 임종 자리에서 아버지 손을 붙잡고서야 마음이 놓이셨는지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든 부딪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젊을 때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며 몸을 아끼지 않았다. 앞날은 무지갯빛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운명의 신은 아버지가 잠시 숨을 고르는 꼴을 보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칠 즈음 아버지는 병을 얻었다. 일제강점기, 북한 의용군, 포로수용소를 거치며 사선을 넘은 고생에다, 부산에서 하루빨리 자리를 잡으려는 욕심으로 몸을 혹사한 탓이었다. 처음에는 늑막염이라 했지만, 이내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폐결핵은 사실상 불치병이나 다름없고, 영양이 부족하면 더 심해질 테니 일을 멈추고 쉬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했다. 병세가 깊어져 더는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에게 맡긴 택시의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요양을 위해 부산 생활을 정리했다. 길을 열어주던 핸들을 놓고 다시 고향의 흙길로 고개를 돌렸다. 또 한 번의 선택이었다.

<논을 팔고 길을 사다>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일찍이 큰아버지를 통해 사두었던 농토는 돌려받지 못했다. 할머니와 형을 돌본 대가로 사 준 땅이 아니냐며 큰아버지는 얼토당토않은 욕심을 부렸다.

논의 명의가 이미 큰아버지 앞으로 되어있어서 달리 손써 볼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큰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 일은 이후 단 한 번도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통해서야 그 사정을 들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천근처럼 무겁고 깊었다. 억울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를 모시면서 어머니와 형을 잘 건사해 준 큰아버지를 차마 나무랄 수 없다고 여겼다.

부산에서 번 돈으로 작은 집 한 채와 논 다섯 마지기를 샀다. 논에서 나는 소출의 절반은 소작인이 가져가고 남은 절반이 우리 몫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다니는 형의 학비며 아버지의 약값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인근에 세를 얻어 구멍가게를 열었다. 연탄도 함께 팔았기에 형과 나는 방과 후에 연탄 배달로 작으나마 일손을 보탰다. 손은 검정이 묻어서 늘 시커멓게 되었고, 겨울이면 손등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다. 부산에서의 화려했던 삶과는 대조되는 곤궁한 나날이었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한 어머니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폐결핵에는 무엇보다 영양이 중요하다 하여, 이웃집에서 개나 돼지를 잡는 날이면 어머니는 늘 다리 하나를 통째로 사 오셨다. 오소리 같은 야생동물도 몸에 좋다 하면 어떻게든 구해다 고았다. 일 년 열두 달 보약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 지극한 정성을 군말 없이 드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 잡수실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었다. 밤이면 기침 소리가 방문을 넘어왔고, 우리는 숨죽여 그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분투인지 알았다.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병은 점차 호전되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어느 정도 바깥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형편은 극도로 어려웠다. 형이 중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밤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자다가 깬 나는 형이 어머니에게 울먹이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동생은 중학교조차 다닐 수 없을 테니 차라리 둘 다 중학교라도 마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어머니는 형의 손을 잡았고, 이불 속에서 나는 울음을 삼켰다. 어린 나이에도 그 말은 꿈을 접는 선언이라는 것을 알았다.

졸업 후 형은 자동차 서비스 공장에 취직했다. 어머니의 간병은 변함이 없었다. 보건소에서 일하던 옆집 누나는 폐결핵에 특히 좋다는 미제 양약을 어렵사리 구해 주었다. 이태를 계속 복용한 그 양약은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병구완은 가족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보태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누나는 형에게 은근한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보더니 병은 멈추었으나, 폐에 남은 구멍 때문에 힘든 일은 무리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숨이 차는 몸이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분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결국 논을 팔아 다시 '길'을 선택했다. 택시를 사서 공장에 다니던 형에게 운전을 맡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화물차로 바꾸었다. 사업이 안정되자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접었다. 아버지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집에 전화가 놓였다. 형은 나를 위해 고등학교를 포기했지만, 나는 비록 실업계였으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집에 전화가 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우리 집을 부자로 알기도 했다. 실제로 부자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때만큼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밥상에 고기가 오르는 날이 잦았다.

여름이면 성주에서 수박을 싣고 서울로 가는 트럭이 김천을 거쳐 갔다.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형이 십여 통의 수박을 내려주곤 했다. 수박 수확기가 끝날 때까지 며칠에 한 번씩 반복되었다. 우리는 그 귀한 수박을 팔 생각은 하지 않고 항상 이웃과 나눠 먹었다.

빚지고 산 세월이 길어서였을까. 나누는 일이 먼저였다. 가난이 우리의 생각을 좁게 만들 법도 했지만, 아버지는 길 위에서 번 돈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분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 집이 어려울 때면 늘 누군가 한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잠시였지만 우리는 마음만큼은 큰 부자였다. 운전은 형이 했고, 아버지는 정비 기술이 있어 웬만한 수리는 공장에 맡기지 않고 직접 손을 보셨다. 운행 비용이 적게 들어 수입은 남들보다 배가 되었다.

<운수運輸라는 이름의 운수運數>

그 시절 사람들은 '운수運輸사업'을 하늘의 운에 맡긴다는 뜻에서 '운수運數사업'이라 부르곤 했다. 그만큼 성패의 기복이 심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형이 군에 입대하자 사업은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전반적인 불황 속에서 자동차 사업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형을 대신할 운전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운전사를 구하고 관리하는 일은 병약한 아버지에게 또 다른 싸움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건설 붐을 타고 있던 시절이라 사채를 얻어 화물차를 덤프트럭으로 바꾸었다. 공사판을 따라 전국을 돌며 현장 한구석에 있는 판잣집에서 기거했다. 집에는 며칠에 한 번씩 왔다.

그해 10월, 나는 은행 입행 시험에 합격했다. 이 소식을 전하려 대구 동촌에서 작업 중이던 아버지를 찾아가 합격 통지서를 내밀었더니 환하게 웃으며 나를 꼭 안아 주셨다. 그 웃음 속에는 안도와 고마움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감정을 보았다.

"너는 이제 네 길을 가거라."

아버지는 말 대신 포옹으로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시내로 들어가 곰탕집에서 점심을 사 주셨다. 그 집은 당시 유명한 맛집이었고, 지금까지도 같은 상호로 영업하고 있다. 나는 요즘도 가끔 그 집을 찾아 곰탕을 시켜 먹는다. 숟가락을 들 때마다 그릇 속에서 그날의 아버지를 만난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와 식당에서 단둘이 식사한 기억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시계 골목으로 들어갔다. 꽤 비싼 시계를 가격 흥정도 하지 않고 서슴없이 사 주셨다. 은행원이 되면 시계도 괜찮은 걸로 차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때 손목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기억 중의 하나이다.

덤프트럭 역시 운수運數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어쩌다 집에 들어오시는 날에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한밤중에 어머니와 나누는 얘기를 엿들으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69년 4월, 내가 발령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업은 부도가 났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채권자들과 원만히 수습은 되었지만, 남은 재산으로 빚의 절반밖에 갚지 못했다. 어머니는 채권자들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숙였다.

형은 대구에서 부대장 운전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나는 형의 부대장이 주선해 주어 대구로 발령을 받았다. 다시 한번, 길이 막히는 순간에 도움의 손길이 문을 열어주었다. 아버지는 쓰러질 때마다 다른 길을 찾았고, 이상하게도 그 길목마다 도와주는 사람이 서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나를 따라 도망치듯 대구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핸들은 이제 새로운 도시의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견디는 사람에게 길은 남는다>

여동생 둘은 김천 친척 집에 맡겨두고, 우리는 대구 서구 원대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말로만 듣던 쪽방이었다.

한 지붕 아래 열 개 남짓 붙어 있는 단칸방이 일자형으로 두 채가 마주 보고 있었다. 마당 가운데에는 공동 수도 하나와 한쪽 구석에 공동변소가 있었다. 하나뿐인 변소를 두고 새벽마다 벌어지는 화장실 전쟁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었다.

방은 셋이 누우면 어깨가 맞닿는 크기였다. 부엌도 없어 방문 앞에 놓인 연탄아궁이에 밥을 지었다. 찬장 대신 방 한쪽에 냄비와 그릇을 포개 두었다. 밥상에는 김치 하나가 전부인 날이 많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신원보증을 서 주었던 사촌 자형이 사업 부도로 고향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은행에서는 보증인을 다시 세우라는 통보가 왔다. 지금은 사라진 제도이지만, 그 시절에는 신원보증인이 없으면 발령이 취소되었다. 부도만 나지 않았더라면 고향에서 신원보증인 하나쯤은 어떻게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와 나는 손을 맞잡고 한숨만 쉴 뿐이었다.

저녁 무렵, 아버지는 말없이 집을 나갔다가 밤늦게야 돌아왔다. 신원보증인을 구했다며 다음 날 아침 인사를 가자고 했다. 대구에서 택시회사를 운영하는 고향 친구였다. 보통학교를 함께 다녔던 사이라고 했다. 몇 해 전 고향에서 동창 몇이 모였을 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며 적어 준 주소를 아버지는 이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이튿날 찾아뵌 사장님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그 어려운 시험까지 치르고 들어갔는데, 신원보증인이 없어서 근무 못 한다면 말이 되냐."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직장에 근무하면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살피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분은 아버지보다도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큰 은인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아버지는 인근 자동차 정비공장을 발견하고 무작정 찾아가 정비공으로 취업했다. 말이 취업이지 나이가 많아 직접 정비 일은 하지 못하고 자동차 밑에서 일하는 수리공에게 공구를 가져다주는 허드렛일이었다.

원래 병약한 몸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지청구를 들으며 하루를 버틴다는 건 중노동이기도 했지만, 육체보다 자존심이 먼저 상처를 입는 듯했다.

밤마다 기침이 멎지 않았다. 어머니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래도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 들고 나섰지만 결국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보름치라도 임금을 받아야 했지만, 아버지는 면목이 없다며 나보고 대신 다녀오라며 내 눈을 피했다. 공장 책임자는 봉투를 내밀며 오래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목이 메었다.

다시 어머니가 생활전선으로 나서야만 했다. 궁리 끝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김천에 살 때 이웃에 친하게 지내던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의 남편은 병이 깊어 치료에 전 재산을 쏟아붓고 돌아가셨다. 남은 가족들은 대구로 이사해 버스 종점에서 간식을 팔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

어머니가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자, 굶어 죽을 수야 없지 않겠느냐며 옆의 빈자리를 소개했다. 폐업한 블록 공장 옆, 버스 차고지에 붙은 천막집이었다. 팔다 남은 블록으로 벽을 쌓았고 지붕은 천막을 덮었다. 안에는 테이블 세 개가 놓였고 판자로 칸막이 친 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에겐 다시 숨을 돌릴 자리였다. 후덕해 보이는 블록 공장 사장은 세를 받지 않을 테니 장사나 잘하라고 했다. 뜻밖의 감동적인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은 고마움으로 가득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마움에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아버지는 블록 공장 사장의 배려로, 차고지에서 버스를 점검하는 일을 맡았다. 밤새워야 하는 일이었지만, 밤낮이 바뀐 것 말고는 그리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어머니는 운전사와 차장들에게 막걸리와 라면을 팔았다. 간신히 호구지책은 되었다. 아버지에게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는 구세주 같은 사람 목록에 블록 공장 사장님과 아주머니가 더해졌다.

나도 첫 월급을 받았다. 생활비에 보태겠다고 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구 하나라도 씨앗을 남겨야 한다며 받지 않았다. 옆집에 부엌도 없는 방 한 칸을 얻어 여동생 둘을 데려왔다.

그 무렵 형은 전쟁 수당에 욕심을 내 월남전 파병에 지원했다. 사단 참모 차량 운전병이 되어 비교적 위험한 일은 없었지만, 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월남전 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다.

일 년 후, 내가 모은 돈과 대출을 보태 18평 남짓한 집을 샀다. 작지만 방이 세 개인, 대구에서 처음으로 마련한 제대로 된 집이었다. 열쇠를 건네받던 날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집을 사자마자 형이 제대했다. 그러고는 바로 결혼하고 방 한 칸을 차지해 신혼살림을 차렸다. 형은 버스 운전사로 취직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고 있었다. 나는 2년 후 집을 살 때 빌린 대출금을 다 갚고, 마음 편하게 군에 입대했다.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 집에는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가게를 찾아가 보니 역시 다른 사람이 보였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웃으며 말했다.

"너네 집 이제 부자 됐다. 그 집 팔고 새집 사서 이사 갔다."

안내받아 간 곳은 대지 40평에 건평이 25평, 방이 다섯 개나 되는 집이었다. 마당에는 모과나무가 서 있고 작은 꽃밭도 딸려 있었다.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모은 돈으로 버스를 사 차주가 되었다. 운전을 형이 직접 하니 돈이 빨리 모였다. 그래서 내가 샀던 집을 팔아 새집을 마련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장사를 접었고 아버지도 일을 그만두었다. 나도 제대하자마자 결혼했다. 이제 아무 걱정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 인생의 기복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삶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듬해, 중학교 2학년이던 막냇동생이 사라졌다. 여름 방학 중에 저녁 먹고 잠시 산책을 다녀온다며 운동복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나간 녀석이 돌아오지 않았다. 온밤을 새워 찾아다니다가 이튿날 경찰에 신고했다. 혹시라도 돌아올까 싶어 밤에도 대문을 잠그지 않았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점치러 다니고 굿을 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북으로 끌려갔다느니, 원양어선에 납치되어 갔다느니, 깡패에게 맞아 죽었다느니 온갖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경찰까지도 그 원인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참척慘慽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그해 겨울 설을 쇠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동생이 사라진 지 여섯 달 만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잃고 연이어 아내까지 잃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말수는 더 줄었다. 그러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손녀를 안고 마당을 서성이는 모습에서 나는 끝까지 버티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다.

형수는 딸 하나를 낳고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다. 대를 잇는 일을 무엇보다 중하게 여기던 아버지의 실망은 큰며느리를 향했다. 형은 운전이 싫기도 했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아 독립을 선언한 뒤 농사를 짓겠다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나는 첫딸을 낳고, 이어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내가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나가며>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난 탓일까.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사업에 의욕을 놓으셨다. 그런 사정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버스 사업은 지입제에서 회사 직영으로 전환되었다. 지입제는 주차장 사용료와 각종 비용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회사에 내고, 남은 수입은 차주의 몫이 되는 제도였다. 직영제가 되면서 회사는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었고, 버스는 모두 회사 소유가 되었다. 아버지는 현금으로 환산한 회사 지분을 받게 되었다.

수입은 연말 배당금으로 지급되었지만, 예전의 오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가계를 위해 직원으로 근무하라고 배려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배당 수입은 아버지 혼자 생활하기에도 모자랐다. 국가 정책 변화로 삶의 기반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즈음 내가 승진하여 고향으로 발령받았다. 나는 가족을 데리고 이사했다. 혼자 계셔야 할 아버지의 외로움을 덜어드리고자 형과 의논 끝에 재혼을 권해 드렸다. 동네 아주머니의 소개로 새어머니를 모셨다.

그러나 오 년 뒤, 내가 다시 대구로 돌아 올 무렵, 어려운 생활 형편과 재산이 없는 아버지에게서 장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이혼을 선택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더라도 친어머니처럼 모시겠다고 말씀드렸으나 어머니는 듣지 않으셨다. 그때도 아버지는 조용하게 받아들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속상함을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다시 한집살이가 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는 경로당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어른들 사이에서 "늙어 한집에 살면서 며느리에게 점심까지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일 년 중 설과 추석 이틀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집에서 점심을 드시지 않았다. 경로당 근처 식당을 돌며 해결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한 번 옳다고 생각한 일은 끝까지 외곬으로 지키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큰집 제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치매에 걸린 큰아버지의 방은 코를 막아야 할 만큼 고약한 냄새가 났다. 나는 인사만 드리고 바로 나오지만, 아버지는 그 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무시는 분이었다. 미움보다는 도리를 먼저 택하는 분이었다.

그 마음은 자연스레 나에게 이어졌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윗대 제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한식과 추석이면 온 가족이 호국원에 계신 부모님을 찾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반드시 아이들이 좋아하는 식당에 들른다. 아버지가 조상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아들과 손주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 나름의 방식이다.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은 아버지에게 평생의 큰 숙제로 남아있었다. 형에게 은근히 작은댁을 보아 아들 얻기를 권하기도 했으나 형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문제는 늘 아버지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듯하다. 내게서 막내로 손자가 태어나자, 그제야 아버지는 안도한 듯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다. 그 무렵 경로당 회장을 맡았고, 성당에도 나가기 시작하셨다. 레지오 단체에 가입하면서 친구들도 사귀어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지지 않았다. 비로소 걱정 없는 편안한 나날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2013년 2월, 먼 길을 떠나셨다. 집에서 석 달 정도 자리보전하며 아들딸 다 불러 얼굴을 보셨다. 마지막 날 손주들 손을 잡은 채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다. 어쩌면 이승의 마지막 십 년이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나는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열다섯 살에 농촌을 벗어나야 한다는 중압감, 스무 살부터 짊어진 가장의 무게를 평생 내려놓지 못한 삶. 아버지가 그때 시골을 떠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영향을 끼친 분이었다.

아버지는 늘 쫓기듯 살았다. 험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정작 자신의 인생을 돌볼 여유는 없었다. 아버지에게도 취미라는 게 있었을까. 술 담배는 일찌감치 끊었고, 영화관에 가는 일도 없었다. 유일한 낙이라고 한다면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거나 가끔 책을 읽는 정도였다. 신문만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손주며느리는 언제나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다녔다. 그때만큼은 아버지 얼굴에 기쁨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버지 역시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노여움을 지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모시고 다니며, 집에 편히 계시게 하면 그게 전부라고 여겼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불효자였다. 아버지 손을 잡고 가까운 해외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올걸. 내 나이 일흔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때늦게 그런 후회가 밀려든다.

아버지는 늘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길을 갈 때마다 손잡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사람 복이 많은 삶을 살았다. 어려울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 그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결국 아버지에게 닿는다. 최선을 다하고 신의를 지켰던 삶. 아버지는 앞선 발자국이었고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따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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