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천사들의 점빵/ 변재영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변재영 님.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변재영 님.

1. 프롤로그

아침 산책길이다. 골목 초입, 익숙한 풍경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자신의 덩치보다 큰 뇌성마비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된 아들을 자동차에 태우려고 어미가 절절맨다. 내가 냉큼 안아 올려 주자 목소리를 잃은 청년은 달덩이처럼 환한 미소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한다. 미운 다섯 살 아이가 새의 부리 같은 입술로 건네는 인사가 저리 고울까. 가식 없는 그의 해맑은 미소가 대문간에 흐드러진 순백의 배꽃만큼이나 곱다.

스무 해가 꽉 차도록 팔매질 거리에 사는 그녀는 늘 입가에 촉촉한 미소를 꽃인 듯 물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 자식을 둔 어미에게 삶은 없다. 오죽하면 내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겠는가. 남몰래 곯은 마음의 상처에선 늘 단장 같은 속울음이 장강처럼 흘렀으리라.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내게도 가슴에 바위 하나 끌어안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힘겨웠던 내 과거를 보는듯해 명치끝이 아리다.

길이 아름답다는 경북 청도 덕암리 418, 속칭 중리(中里)라는 동네가 나의 태자리다. 비탈에 기댄 산촌에는 논보다 밭이 많다. 한국전쟁의 포성 소리가 멎을 즈음 생을 외친 나는 태생부터가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원주변씨 18대손으로 종손인 할아버지는 내리 딸 다섯을 낳았다. 아들 타령으로 시작된 주벽은 결국 패가망신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 후유증이리라. 화병인지 술병인지 불혹 초반에 생을 접었다. 늦둥이를 어미 뱃속에 둔 채……. 죽어서도 작은 몸뚱이 하나 뉠 땅이 없어 처가댁 선산발치에 묻혔다.

2. 밥값은 해야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나이 겨우 일곱 살, 울긋불긋한 상여가 두려웠으리라. 동네 사람들은 먼산바라기 하는 어린 상주를 자꾸 상여 밑으로 밀어 넣으며 쯧쯧 혀를 찼다. 부잣집에서 화초처럼 자란 할머니는 마음씨만 고울 뿐 살림에는 젬병이었다. 설상가상 유복자로 태어난 삼촌은 첫돌도 맞기 전에 열병을 앓아 소리를 잃었다. 듣지 못하니 말도 못 한다. 아버지는 여남은 살을 넘기면서 꼴머슴으로 나섰다. 하지만 새경이래야 철에 따른 옷 두어 벌과 쌀 한 가마니가 고작이었다. 그것으로는 일곱 식구의 끼니도 부족했다.

굽도 접도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포기를 생각한다. 아버지 나이 열일곱 살, 더 버티지 못하고 양잿물을 마셨다.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쌀무리로 속을 씻어내는 바람에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그때 속을 버려 평생 위통으로 소다를 복용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일사각오(一死覺悟)라고 했다. 죽을 용기로 일한다면 못 이룰 일이 무에 있으랴. 덤으로 목숨을 얻은 아버지는 머슴살이로만 안주할 수가 없었다. 눈만 뜨면 손발이 부르트도록 산밭을 일구었다. 일굴 땅이 있어서도 아니다. 남의 땅을 개간하여 길게는 10년쯤 경작하고는 땅 주인에게 돌려줬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소작인 셈이다.

산전을 일구는 일은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 청도군 매전면 중산리, 하늘 아래 첫 동네가 아버지의 처가댁이다. 집도 절도 없는 노총각에게 뉘가 딸을 주겠는가. 악착같이 집과 땅마지기를 마련하여 첩첩산중, 밀양박씨 가문으로 늦장가를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택호가 '중산이댁'이다. 빈촌의 상징이라 나는 늘 못마땅했다.

당시 그곳에는 내 외가를 비롯하여 스무 집이 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밤마다 빨갱이들이 곡식을 털어갔다. 결국 그 등쌀을 견디지 못해 죄다 산 아래 큰 마을로 이사하고 두 집만 남아 농사를 지었다. 그중 한집이 우리 집이다. 사는 일이 산밭처럼 가팔랐던 아버지는 소작료가 없는 흔한 땅에 혹하여 시퍼렇던 청춘이 툭 부러지도록 일을 했으리라.

일찍부터 험한 세파에 부대낀 아버지는 남달리 담이 컸다. 생명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게 빨갱이들이 아닌가. 그런 늑대인간들이 득실대는 산속에서 목숨을 담보로 농사를 지었으니 그만큼 아버지의 삶이 각박했으리라. 양식을 약탈하려고 빨갱이들이 밤마다 무리 지어 큰 마을을 오르내렸다. 이슥한 달밤에 섶에 숨어 그들의 행렬을 지켜보면 후미에는 총 개머리판이 땅에 닿을 듯 말 듯한 어린 소년들도 여럿 있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단다.

땅이 소원이던 아버지는 눈만 뜨면 묵정밭을 일궈, 보리와 콩을 심었다. 가뭄에 강한 작물이라 세세연년 풍작을 맞았다. 그 덕에 해마다 고향에 자갈논 한 마지기씩을 샀다고 하니 우리 가족에게는 고마운 땅이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자면 손에 물집이 잡히기를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그 고통이 오죽했겠는가. 아버지가 피땀으로 일군 그 땅에는 이제 한 많은 세월을 뒤로하고 2010년 '오션힐스 골프장'이 들어섰다. 생각하면 금석지감이 인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고향에 오두막이지만 집도 마련하고, 네댓 마지기의 전답도 있었다. 그때는 왜 그리도 가뭄이 심했는지. 물꼬를 생판 하늘에만 꽂고 있는 천둥지기는 툭하면 가뭄에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져 반작으로 그칠 때가 많았다. 말이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그래도 풀죽이지만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형편이 좀 나아져서인지 손재주가 남다른 아버지는 산밭 일구는 일을 그만두고 목수 일을 배워 집 짓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 일이 늘 있는 건 아니다. 일이 없을 때는 지게, 쟁기, 써레 등 농기구를 만들어 팔았다. 솜씨가 좋아 삼십 리 밖에서도 주문이 쇄도 할 만큼 인기가 많았다.

농투성이들의 본능일까. 아버지는 글공부보다는 땅을 믿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늘이려는 욕심에 누나 둘은 초등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열네댓 살 나이에 식모살이로 팔려 갔다. 월급도 없었다. 입 하나 들자고 여린 손이 얼어 터지도록 일을 해야 했다. 그 고통이 오죽했겠는가.

"밥값은 해야지"

내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란 말이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철학이자 종교였다. 저녁 밥상머리에 둘러앉으면 아버지는 마치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듯 그날 우리 형제들이 한 일을 하나하나 챙긴다. 어리다고, 몸이 불편하다고 더덜이는 없었다. 어쩌다 농땡이라도 부린 날이면 그날 밥은 없다.

주린 배를 움켜쥐던 시절, 아버지에게 밥 먹는 일보다 더 절실한 게 또 있었으랴. 밥은 그냥 밥이 아니라 신앙이고 목숨이었다. 그 밥그릇의 무게가 자식에게도 밥값이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소여물을 안치고 쇠꼴을 한 짐 베어와야 수저가 주어졌다. 이처럼 너무 일찍부터 노동에 휘둘린 탓이리라. 우리 형제들에게 구슬치고, 연 날리고, 썰매 타는 추억이 없다. 팝콘 한 줌을 얻기 위해 종일 돌을 깨는 네팔의 어린 소년을 TV 화면으로 만나면 내 유년을 보는 듯해 가슴이 아리다.

3. 불행은 소리 없이 온다.

베이비 붐 세대만 해도 아들은 곧 금이고 옥이었다. 둘째 아들을 얻었다는 반가움도 잠시, 동생은 돌이 지나도 걷지를 못했다. 설마 했는데 아니었다. 두 돌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다. 축 처진 왼쪽 수족을 인지한 것이다. 놀란 어머니는 그 핏덩이를 들쳐업고 용하다는 병의원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쫓아다녔다. 하지만 허사였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뇌성마비를 앓았다는 진단이 전부일 뿐, 처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환은 누구도 엄습하지 못할 공포와 슬픔으로 슬그머니 우리의 곁에 똬리를 튼다. 한집에 불치병 환자가 한 사람이라도 생기는 순간 집안의 웃음과 희망은 사라진다. 손가락 끝으로 허공에다 언어를 쓰는 삼촌이랑 깜부기 같은 병으로 한쪽 수족이 마비된 동생과 나는 같은 방을 섰다.

논밭일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몸이 불편한 동생을 거두는 일은 내 몫이었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학용품을 챙겨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오른쪽 발목이 뒤틀려 게걸음을 걷는 동생은 모든 것이 느렸다. 한 발짝 떼자면 하늘이 출렁거렸다. 그마저 보폭이 30㎝를 넘지 못한다.

세 살 무렵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고, 다섯 살 때 겨우 두 발로 일어섰다. 학교도 한 해 유예했다. 언제나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학교에 가고 늦게 돌아왔다. 한쪽 날개가 꺾인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철없는 또래 아이들이 곰배팔에 절름발이 흉내를 낼 때면 나는 그들을 혼내주려고 쫓아다녔고, 어머니는 아궁이 속에 지피던 솔가지 연기로 눈물을 감추었다.

큰누나가 결혼했다. 그러자 이미 혼기를 놓친 삼촌은 자기가 먼저 장가를 들어야 한다며 일손을 놓고 투쟁에 들어갔다. 듣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까지 없는 건 아니다. 반응이 없자 두문불출로 식음까지 전폐했다. 난감했다. 신붓감을 찾기 위해 지인을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했던가. 멀리 경남 밀양에 마땅한 규수가 있었다.

그녀 역시 첫돌 전에 청력을 잃어 소리가 없는 노처녀로 삼촌과는 천생연분이었다. 그 규수를 숙모로 맞았다. 처음엔 내림이 염려되어 자녀를 두는 게 꺼림 척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남매를 뒀는데 둘 다 똑똑하다. 집안의 기둥인 맏아들은 지금도 지적 공사에 간부로 근무한다. 똘똘한 손자까지 삼촌 내외는 물론 온 가족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게걸음을 걷는 동생 역시 평생 앉은뱅이로 산다고 여겼는데 목발 없이 걸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신이 내린 축복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공부까지 잘해서 우리 집의 꽃이었다. 행복은 작은 일에서 비롯된다. 소확행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대물림 된 가난이야 어쩔 수 없지만 욕심을 내려놓으니 얼음 냉골 같았던 우리 집에도 봄볕처럼 따스한 온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4. 인생 삼세판

내가 아홉 살이 되어도 아버지는 학교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새 나는 쇠꼴 베고, 소먹이고, 목수인 아버지가 만들어 준 맞춤 지게를 지고 땔나무까지 하며 밥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당시 여자들은 살림만 잘하면 된다는 어른들의 편견으로 초등학교를 보내지 않는 가정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남자로서는 70여 호나 되는 동네에서 내가 유일했다. 그렇다고 학교에 보내달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보챈다고 들어줄 아버지도 아니었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늦깎이로 입학했다. 어차피 공부는 초등학교 졸업으로 마침표를 찍을 건데 구태여 일찍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었으리라. 용산초등학교, 전교생이 780명쯤 되었다. 입학식은 운동장에서 이루어졌다. 푸른 하늘, 맑은 햇살, 교정을 에워싼 측백나무 숲이 왜 그리도 싱그럽던지. 난생처음 배움의 날개를 달던 그날, 내 뜨겁던 숨결은 지구촌 누군가의 어제와 내일을 넘어섰다. 교장선생님의 훈시보다 내 높은 꿈을 축복하듯 교실 창문을 기웃대며 짹짹거리던 참새들의 수다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양복보다는 코르덴 재건복을 즐겨 입으시던 예해식 선생님, 참으로 가슴 따뜻한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났다. 누덕누덕 누빈 솜옷을 입고 다니는 내가 딱했을까. "좋은 옷이란 값비싼 옷이 아니라, 꿰맨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서 입으면 그것이 좋은 옷이다"라며 수시로 용기를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반에서 가장 어려운 학생 예닐곱 명을 골라 당시 유일한 참고서인 '수련장'을 당신 사비로 사주시던 기억도 난다. 촌지 대신 꿀단지가 오가던 시절, 선생님 같은 청백리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도 그 수련장을 선물로 받아 공부했으니 우리 집 살림이 얼마나 팍팍했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때 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은 오로지 육성회비였다.

두어 달 수업 후, 선생님은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치맛바람이 통하지 않는 선생님이다. 공부는 식은 죽 먹기였다. 꽃길만 걸어온 사람들에게 공부가 쉽다고 하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하지만 일 년 내내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거친 농사일에 시달려보라. 앉아서 하는 공부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노동은 밤낮이 없었다. 공부는 학교에서나 하는 것이고 집에 오면 책보자기 풀 틈도 없다. 칠전팔기의 속성이 잡초의 정신인가. 비탈에 켜켜이 누운 논두렁의 풀은 깎고 또 깎아도 돌아서면 수북했다. 저녁에도 밤이 이슥하도록 호롱불 아래 어머니가 캐온 삽주라는 약초 뿌리를 깎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2학기부터는 반장인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잔무를 정리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1학년을 끝내고 2학년이 되던 날이다. 서둘러 들어오신 선생님이 대뜸 내게 책보자기를 싸서 따라오라고 했다. 선생님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너편 3학년 교실이 있는 별동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를 지날 무렵이다. 앞서 걷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재영아, 너는 이제부터 3학년이다. 2학년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구나. 앞으로도 열심히 하거라"

그제야 나는 월반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정에 두어 번 꽃물이 졌다. 5학년에서 다시 봄을 맞았다. 무슨 인연일까. 1학년 때 담임이셨던 예해식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내심 뛸 듯이 기뻤다. 매주 문예반 특활 시간에 뵙기는 했지만 담임으로 만난 것과는 또 달랐다. 문예반에서 작문 지도를 맡고 계셔서인지 선생님은 일기 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주말마다 또박또박 일기장 검사를 했다. 그때마다 내 일기장만 슬그머니 가져가셨다. 다음 날 돌려줄 때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연유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여쭤볼 수도 없었다.

늦봄 어느 날이다. 수업이 끝나고 돌연 선생님이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는 자갈이 질펀한 비포장도로를 달려 우리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만나 상의할 일이 있다는 게 말씀의 전부였다. 뜬금없는 선생님의 방문에 놀란 건 조용했던 산골도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던진 화두는 내 일기책을 발간하자는 것이었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깜짝 놀란 나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몽롱했다. 그제야 그동안 선생님이 슬그머니 내 일기장을 가져가시던 수수께끼가 풀렸다.

"우리 집은 왜 이리도 가난할까? 이 고통의 끝은 어디쯤일까……?"

햇살 쏟아지는 봄날에도 춥고 시리기만 했던 내 아픔과 슬픔을 넋두리로 읊은 것이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돌이켜보면 그때 끼니 챙기듯 꼬박꼬박 쓴 일기가 지금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한 뿌리가 되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발간 비용이 16만 원, 그중 절반은 선생님이 부담하고 절반을 아버지가 부담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선생님 월급이 1만 원에 불과했다, 8만 원은 결코 만만한 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형편이 안 된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 수익금으로 나를 대학까지 무난히 공부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오직 땅이 목숨인 아버지에게 통할 리가 만무했다. 선생님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표정을 보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오신 듯했다.

시간은 계절을 돌아 나뭇가지에 젖은 가을이 저물고 있었다. 『초록 메아리』 내 일기책 제목이다. 돌연 선생님이 책 발간을 서둘렀다. 읍내 변두리에서 머슴을 들여 농사까지 짓는 선생님은 그동안 소리 소문 없이 혼자 월급을 모아 인쇄비를 마련하신 것이다. 대구 남산동, 인쇄 골목 끝자락이었다. 선생님의 지인이 운영하는 인쇄소를 찾았다. 선생님은 사장님에게 "불우 학생이니 염가에 발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고, 나는 사장님께 큰절을 올렸다. 미리 원고를 받아 읽어 보신 사장님은 베스트셀러감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출간을 기다렸다. 윤전기가 막 돌아가고 있을 때다. 정확히 1964년 11월 15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대구 명덕초교에 다니는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일기책이 발간되었다는 보도가 부산일보 조간신문에 실린 것이다. 책도 나오기 전에 기사가 먼저 떴다. 어쨌든 내 일기책보다 한발 앞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가파른 운명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신문 한 줄에 내 꿈은 깨진 유리그릇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는 나와 학교만 다를 뿐 한동갑에 학년도 같았다. 4학년 한 해 동안에 쓴 일기를 모아 5학년 들어 책으로 펴내는 것조차 똑같았다. 다만 도시와 농촌이라는 삶의 무대만 달랐다. 그것만으로는 뒤에 나온 내 책까지 빛을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생님은 돌아가는 윤전기를 멈추었다. 결국 내 일기는 활자가 되지 못했다. 선생님도 나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먼 하늘만 바라봤다.

미련이 남았을까, 선생님은 청도 교육장님을 찾아갔다. 군내 모든 초등학교에서 권당 150원 하는 내 일기책을 학급마다 한 권씩만 사달라고 애원했다. 베이비 붐 시대라 그것으로 발간 원가는 된다고 했다. 결과는 거절이었다. 만약 그때 내 일기책이 세상에 먼저 나왔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내 인생 첫 번째로 찾아온 기회는 그렇게 문턱에서 놓치고 말았다. 일기책 발간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선생님은 내게 난생처음 기차를 태워주었고, 군내 백일장에 참가하여 입상했을 때다. 해물이 일품인 중국집 짬뽕 맛을 알게 해주는 등 많은 추억을 남겨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이듬해 졸업식장이다. 최고 권위인 교육장 상을 받을 학생이 호명되었다. 빡빡머리에 검정 고무신, 물이 다 빠진 허름한 양복을 걸친 꼬맹이가 받아 갔다. 우등상, 개근상, 그리고 일기 쓰기 등 시상을 미뤄 둔 겨울방학 우수 과제물 전시회 때 입상한 상장 2개까지 무려 5개의 상을 그 꼬맹이가 석권했다. 그러자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그 꼬마가 바로 나다.

그날 교육장 상을 전수하러 오신 분이 청도중학교 허삼극 교장선생님이었다. 당시 청도에는 모계중고등학교와 청도중학교 2개교가 있었다. 둘 다 사립이다. 공부를 좀 한다고 하면 죄다 대구로 유학길에 오르기 때문에 두 학교는 우수 학생 유치경쟁이 심했다. 내가 형편이 어려워 농사꾼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한 교장선생님은 곧장 교실 뒤쪽에 갓을 쓰고 엄전하게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담판을 벌였다.

"교장인 제가 3년 장학생을 보장할 터이니 아드님을 우리 학교에 보내주십시오"

"공부시킬 수 있는 형편이 못됩니다. 월사금만 해결된다고 돈이 안 들어갑니까? 책값도 만만찮고요"

"아, 책은 학교에서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교복은 어쩐다요?"

"옷은 곤란합니다만 형편이 딱하다니 교복도 드리죠. 이제 아들내미를 학교에 보내주시는 거죠."

"글쎄요. 워낙 골짝이라 학생들이 죄다 자취나 하숙을 하던데 하숙비를 준다면 생각해 보죠"

아버지는 애당초 진학시킬 생각이 없어 거절할 꼬투리만 찾고 있었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 가르치는 일을 두고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한 자식 살리자고 열 자식을 굶어 죽게 할 수는 없었으리라. 중학교 졸업으로 반그치를 만들 바에야 농사일이나 제대로 가르치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흥정은 파투가 나고, 내 인생 두 번째 찾아온 기회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아들을 경북대 사범대에 보낸 재종 숙부님까지 동원하여 교장선생님이 두어 번 더 우리 집에 걸음을 하셨지만 끝내 아버지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 당시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 앞산 밑에 있는 심인중학교에서도 서무과장님이 첩첩산중에 웅크린 우리 집까지 찾아와 3년 장학생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똑같은 방법으로 거절했다.

나는 부지런히 일을 했다. 아니, 밥값을 하자면 농땡이를 부릴 수가 없었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전답도 늘릴 수 있다고 믿었다. 결혼한 삼촌이 분가하자 땔나무 담당은 내 몫이 되었다. 매미가 두어 번 여름을 울고 갔다. 그제야 철이 든 것일까.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똬리를 틀었다. 사춘기에 대한 반항심도 한몫했으리라.

농촌 일은 땔나무나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에 산판이라도 열리면 어깨에 피멍이 들도록 통나무를 져 날라야 푼돈 한 푼 만질 수 있었다. 추운 겨울도 예외는 아니다. 저수지를 보수하는 공사장에서 봄이 저물도록 흙을 져 날라야 했다.

저수지 바닥에서 싸리나무 발채에 흙을 무겁도록 퍼 담아 짊어지고 아녀자들이 망깨질을 하고 있는 못둑에 오르면 십장이 자신의 도장을 찍은 하얀 쪽지 한 장을 준다. 내게는 노란색 쪽지가 주어졌다. 노랑 쪽지는 두 장을 모아야 장정이 받는 흰색 쪽지 한 장이 된다. 하루 일을 마치고 그것을 모아 제출하면 보름마다 원조 밀가루 서너 포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며 보릿고개를 견뎌냈다.

동네에서 보리쌀 말이라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오일장마다 부녀자들은 푸성귀를 이고 가고, 남정네들은 땔나무를 내다 팔아 가용에 쓸 푼돈을 마련했다. 장날이면 신작로에 나뭇짐이 줄을 선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제작한 농기구를 짊어지고, 나는 땔나무를 지고 뒤따랐다. 주로 장작을 지고 갔지만 가끔은 솔가리나 삭정이를 지고 갈 때도 있었다. 나무전에 들리려면 장작 서너 개비를 장세로 내야 했다. 그것을 아끼려고 그 무거운 나뭇짐을 짊어지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나무 사이소, 장작 사이소~"

읍내 후미진 골목을 헤매다 보면 몸은 땀범벅이 되고 목이 탄다. 시골처럼 물 한 쪽박 얻어 마실 곳도 없다. 그럴 때 아는 여학생이라도 만나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나뭇짐의 무게가 주는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남루한 내 몰골이 주는 모멸감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지게는 힘보다 지는 요령이 먼저다. 예닐곱 살 때부터 지게질을 시작한 나는 누구보다 지게질에 익숙했다. 내 나이 열일곱, 내 나뭇짐은 웬만한 장정 못지않았다. 힘의 상징인 쟁기로 소를 부리며 보릿골도 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작은 거인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요령이 늘수록 더욱 무거운 짐에 도전하게 되고 그만큼 골병이 든다. 몸의 골격이 제대로 여물기 전에 무리하게 지게질을 한 탓이리라. 나는 두 어깨의 골육이 앞으로 굽어 평생 장애 아닌 장애인이 되어 기형으로 살고 있다.

몸이 고달플수록 잊어버렸던 공부에 대한 미련이 슬슬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4H 클럽에서 운영하는 마을문고에서 낡은 소설책이나 철 지난 잡지를 읽는 게 고작일 뿐, 배움의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꿈이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절해고도의 끝점인 듯 해무에 뒤덮인 내 앞날은 아득했다.

어느 여름날이다. 어머니랑 읍내 정미소에서 한해 양식인 국수를 뽑아 이고 지고 신작로를 걷고 있었다. 알곡이라 무거웠다. 미루나무 그늘에 지게를 받쳐놓고 잠시 땀을 말리고 있을 때다. 국수 상자를 덮은 폐신문지에서 내 눈이 번쩍 경기를 일으켰다.

'출세의 길! 중앙강의록'

산촌에서도 독학으로 배울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나의 잿빛 등뼈 사이로 흘러든 한 줄기 빛이었다. 다음날 당장 1년 치 중학 과장 강의록 12권을 한꺼번에 주문했다. 아버지께는 소설책을 읽는다고 속이고 호롱불 밑에서 밤새워 책을 읽었다. 일터에서도 쉴 때마다 너럭바위에 영어단어를 쓰고 지우며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향학열에 고무될수록 바람든 무처럼 손에서 일은 뜨고 몸을 다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해가 바뀌고 봄이 기울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동기생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과외수업에 들어갔다. 통학 거리가 멀어 읍내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바람에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말을 섞을 사람도 없고, 머리를 기댈 그 무엇도 없었다. 통금 같은 외로움에 그저 먼 하늘만 바라봤다.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영영 땔나무꾼으로 남는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땔감을 줍던 나는 맥이 풀려 너럭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 기차가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이 나왔다.

비구름 아흐레에 햇빛 하루쯤이 우리의 삶일 진데 내 인생에는 어찌 빛 한 줌 없을까? 억울하고 서러웠다. 괜스레 심통이 났다. 애꿎은 보리수나무를 발로 툭 찼다. 잎자루에 붙어 흘레 중이던 무당벌레 한 쌍이 바위에 툭 떨어져 나뒹굴었다. 죽어도 한 몸이란다. 낫등으로 탁 쳤다. 딱지 속 명주 날개를 파르르 떨며 둘이 한꺼번에 요절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내 꼴이 한심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날 저녁 나뭇짐을 부려 놓은 나는 사랑방으로 건너가 대뜸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는 내일 공부하러 떠날 겁니다. 10월,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에 가려고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뜬금없는 소리에 아버지는 말없이 천정만 바라보셨다. 이제는 머리가 굵어져 우격다짐으로는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이튿날, 동네 서당에 마지막 훈장을 지낸 당숙을 부르고, 읍내로 시집간 누님 내외도 함께 호출했다.

"이놈이 지금 공부하겠단다. 3년이나 썩혔는데 가당키나 하남?"

"아이고 형님! 조카는 나뭇짐을 지고도 작대기로 땅에 글을 쓰며 다니는데, 당연히 공부시켜야죠"

다행히 당숙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를 비호했다.

"농번기 때 모내기는 누가 하고?"

"빙장어른, 우리가 거들어드릴 테니 걱정 말고 처남을 하루라도 빨리 공부하러 보내세요"

이번에는 매형이 거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다. 지게를 버리고 책을 택한 나는 학원 수강을 위해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10월 검정고시에 떨어지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명이 족쇄처럼 따라붙었다. 농사꾼에게 갈음옷이 있겠는가. 닳아빠진 검정 고무신에 빛바랜 남방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청도역에서 한 시간을 달려 대구역에 내렸다. 자동차도 사람도 어찌 그리 많은지. 북적이는 인파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역광장 끝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읽었다.

'검정고시의 전문, 경북고시학원!'

약도를 보고 찾아갔다. 동성로 입구, 한일극장 앞에 있는 목조 건물 2층이었다. 합판으로 칸을 막아 그런지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려 불안했다. 지금은 고인이지만 당시 박재욱 원장님은 그 학원을 모태로 후일 범어동에 경신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한 뒤 1971년에 지금의 경신고등학교로 개편했다. 2003년에는 경산 남천에 대구외국어대학을 설립하고, 11대와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검정고시가 치러질 10월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6개월, 마음이 급했다. 1년 과정이지만 그동안 읽은 강의록을 밑천으로 중학교 3학년 과정을 수강했다. 영어 시간이다. 칠판에 지렁이 기어가듯 꼬부랑글자를 가득 써 놓고 독해 중이었다. 선생님의 유창한 영어 발음이 신통함을 넘어 신기에 가까웠다. 한국 사람인지 서양 사람인지가 헷갈려 한 시간 내내 선생님의 코만 바라봤다.

읍내 당숙네의 쪽방에서 기차 통학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나무로 불을 때어 손수 아침밥을 지어 먹고 도시락도 샀다. 코피를 쏟아내며 공부에 매달려도 영어와 수학 과목은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다가 염치 불고하고 글동냥에 나섰다. 하굣길에 생면부지의 청도중학교 교무실을 찾아갔다. 다행스럽게도 학교가 청도 역전에서 코앞이었다.

남녀 공학이다. 하얀 운동화에 말쑥하게 교복을 받쳐입은 여학생들이 길거리에서 거지라도 만난 듯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하지만 내 초라한 존재마저 꺼내 볼 여유가 없었다. 먼저 영어 선생님을 찾았다. 박재영 선생님, 내 이름과 같았다. 고학생임을 밝히고는 꾸벅 절을 했다. 그런 다음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난제를 요약한 A4 한 장을 내밀었다. 내 몰골이 측은했는지 흔쾌히 도와주셨다.

자리를 옮겨 수학 선생님을 찾았다. 이수동 선생님, 역시 친절하게 문제를 풀어주셨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재회로 이어진 수학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의 두께는 몇 겁이나 될까. 후일 내가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우리 학교로 전근 오셔서 내 담임을 맡았다. 그때 세상은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동냥이 오래 지속되자 내 얘기는 교장선생님의 귀에도 전해졌다. 3년 전, 하숙비까지 달라던 농투성이의 무례함이 떠올랐으리라. 나를 기억하신 교장선생님은 학교 도서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진정 가슴 따뜻한 분들이었다.

두 선생님의 도움이 지렛대가 되었으리라. 그해 시월, 나는 고입 검정고시를 무난히 통과했다. 반년 동안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교재에 코피 쏟아붓기를 여러 차례, 시험 당일에도 위경련이 도져 진통제로 버텼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내 인생 삼세판, 마지막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검정고시의 변별력이 높아 상위 성적으로 합격하면 일류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국립이라 공납금이 가장 저렴한 경북대 사대부고에 입학시험을 치렀다. 탈락했다. 전년도부터 남학생 3학급을 줄이고 여학생 3개 반을 별도로 뽑는 바람에 남학생의 커트라인이 상대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후기 모집에 중앙상업고등학교를 택했다.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되는지라 졸업하면 직장을 가져야 하고, 장학금으로 짓누르는 아버지 어깨의 짐도 들어드려야 했다.

3학년이 되던 해다. 1971년 10월, 남들이 부러워하는 9급 세무직 300명 모집에 90등(등록번호가 석차임)을 했다. 50명이 시험 보는 교실에서 겨우 한 명꼴로 합격자가 나왔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경쟁은 치열했다. 운명일까. 그해 공무원 정원제가 생기면서 감원 바람이 불었다. 부처마다 정원의 5%에 해당하는 인원이 자연 감소 될 때까지 임용이 보류된 것이다. 인력 소모가 큰 체신부에 임용을 원하면 일주일 이내에 발령을 내어주겠다고 총무처에서 매달 왕복 엽서를 보내왔다.

아버지는 바람 타지 않는다며 세무서보다는 우체국 근무를 원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엽서 동의란에 붉은 도장밥을 남겼다. 군대 입대를 10개월 앞두고 있었다. 일단 발령을 받아야 3년이라는 군 경력을 보탤 수 있었다. 하여 조바심도 났으나 그보다는 제대 후 당시 보통고시로 불리는 7급에 도전하려는 나의 또 다른 꿈이 가슴속에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후다. 옛 가야의 서울인 고령우체국에 발령이 났다. 농투성이에서 일약 화이트칼라로 삶을 바꾼 것은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니었다. 가난이 준 서러움과 고통과 눈물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사막처럼 물기 없는 세상에서 내가 마른침을 삼키며 무겁고 뜨겁게 피운 한 송이 소금꽃이었다.

후일 임종을 앞둔 아버지께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들아, 그때 너를 중학교만 보냈어도 고등고시는 따 놓은 당상일 텐데 아비가 까막눈이라 안 할 고생만 시켰구나"

"아니요. 아버지! 농부 아들로 태어나 이만하면 성공한 게 아닐까요.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상장으로 벽을 도배해도 씩 웃기만 할 뿐 칭찬 한마디 없던 아버지였다. 그래도 중학교 진학을 막은 일이 평생 가슴에 갈고리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드렸다.

5. 동생의 죽음

남영호 여객선 침몰로 326명의 목숨을 앗아간 1970년도 12월은 악마의 달이었다. 목숨 지고 꽃 지던 그달, 천사로 살아온 내 동생도 갔다. 음력 섣달 초하루, 할아버지의 기일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노을이 붉었다. 용광로 같은 노을을 붙잡고 동생이 보챘다.

"형, 우리 역에 고모님 마중 가자"

"응, 혼자 다녀와. 형은 문어도 오려야 하고, 밤도 쳐야 하고 향도 빚어야 해"

대구에 사는 막내 고모님은 제사 때면 늘 초저녁에 도착하는 막차를 타고 오셨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한 마장 길인 신작로에서 동생이 뺑소니를 당한 것이다. 머리를 다쳐 의식을 잃은 동생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내가 동행했다면 무탈했을까. 아쉬움 그리움 안타까움에 죄책감까지 겹쳐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닭똥 같은 눈물만 펑펑 쏟아졌다.

초등학교 졸업반인 동생은 비록 게걸음을 걸지만 공부도 잘하고 마음 씀씀이가 샘물처럼 맑았다. 친구들이 학용품에 눈독을 들이면 죄다 나눠주고 정작 손이 불편한 자신은 늘 몽당연필로 글을 썼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뭇시선이 차갑고 따가울수록 공부에 매달렸다. 책벌레가 따로 없었다. 잠을 쪼개며 책과 씨름한 보답이리라. 한 번도 전교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형! 나도 공무원이 될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지! 발로 뛰는 공무원만 빼고"

아침까지만 해도 대학 갈 형편이 못되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내가 부러웠는지 반짝이는 눈빛으로 푸른 꿈을 키우던 동생이 아니던가. 혐오와 조롱과 모욕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 대접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평생 괴물 취급만 당하다가 그렇게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갔다. 내 가슴에 뽑으려 해도 영원히 뽑을 수 없는 마목 같은 옹이 하나 심어놓고서……. 하긴 오히려 편견 없는 그곳이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6. 천사들의 점빵

시간이 약이다. 빈말이다. 동생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직장을 갖자 더 심해졌다.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나는 장애인 시설을 찾았다. 그렇게라도 그들과 함께하고 나면 꽉 막혔던 숨통이 조금은 트였다. 제대 후 대구로 전보된 나는 처음 두어 달은 주말마다 음성 꽃동네 희망의 집에 자원봉사를 신청하여 그들의 손발이 되어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전신마비 환자를 목욕시킬 때 초보자들은 달라붙은 겨드랑이나 오금에는 선뜻 손이 들어가지 않는다. 동생을 키우다시피 한 나는 매만지는 손길이 익숙하여 그들과 쉬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서로 대화까지 익숙해진 나는 대구에서 가까운 시설을 찾았다. 경산 고산에 자리한 자유재활원에서 정례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자원봉사를 할 때마다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일손에 늘 가슴이 아팠다.

1982년 1월 1일, 철밥통 직장으로 치부되던 국가기관에서 정부 투자기관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해 연말, 한국통신 대구본부에서 승진한 나는 첫 발령지였던 고령전화국 총무과장으로 영전했다. 그때 봉사활동을 위해 고령군청으로부터 안내받은 시설이 인근 성산면에 있는 국제재활원이다. 지금은 성요셉재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직원들에게 각출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들고 봉사에 뜻있는 직원들 몇 분과 함께 시설을 찾았다. 양지바른 언덕에 터 잡은 그 천사의 집에는 무연고로 세상에 버려진 갓난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주로 뇌성마비를 앓는 중증 장애인 50여 명이 힘든 하루하루를 원장님의 기도로 극복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예배 시간이다. 원생들 모두 강당 바닥에 뉘어졌다. 천 가지 얼굴로 만 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내심 나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살아있다면 "이 잔인한 고통을 즐기고 있느냐?"고 말이다. 하늘이 원망스러워 슬쩍 부아까지 치밀어올랐다. 사지가 멀쩡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부터 나는 평생을 그들의 손발이 되겠다고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에게 맹세했다.

연말이라 가끔 기관 단체에서 라면 상자나 쌀 포대를 들고 왔다. 그런데 그들은 미리 준비해 온 현수막까지 내걸고 기념사진만 찍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생색이나 내는 그들이 싫었다. 원장님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사진 속에서는 활짝 웃고 있지만 불편한 몸으로 억지 춘향이 된 그들이 좋아서 사진을 찍겠는가. 하긴 이 글을 쓰다 보니 사진 한 장쯤 남겨놓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다. 손에 쥔 게 있어야 봉사활동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직원들과 함께 고민하던 나는 전화국 내에 무인 판매대를 설치키로 했다. 그 수익금으로 시설에 도움을 줄 요량이다. 휴게실 문패를 내리고 『천사들의 점빵』이라는 근사한 간판을 달았다. 진열대를 짜고 각종 차와 음료수, 빵과 라면 등 주로 간식거리를 염가로 납품받아 진열했다. 직원들이 비치된 장부에 기록하고 물건을 소비하면 봉급날 월급에서 공제했다. 일일 결산은 별도 업무가 없는 노조 지부장님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맡아 줬다.

직원이 70여 명, 면회라도 오면 다방에 가는 시간과 비용도 절감되어 일거양득이라 전 직원이 환영했다. 특히 전자실 시험실 동력실 등 야간 숙직 인원이 예닐곱이나 되어 그들이 소비하는 야식비만 해도 상당하여 수입은 짭짤했다. 그 수익금으로 재활원의 보온물통, 정수기, 세탁기 등 낡은 비품을 차례로 교체해 주었다. 재활원과 전화국 간에 자매결연을 맺고 매주 예닐곱의 직원들과 봉사활동을 나갔다. 그때마다 원생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덤으로 챙겨갈 수 있어서 마음이 흐뭇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음성 꽃동네의 돌비가 떠올랐다. 그랬다. 이곳에서는 휠체어만 탈 수 있어도 축복이다. 온전한 정신으로 혼자 걸을 수 있는 원생이라곤 열네댓 살의 은연(가명)이가 유일했다. 이곳 재활원의 마스코트라고나 할까. 그녀는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맨 먼저 봉사단원을 맞았다.

그녀 역시 자폐증을 앓았다. 사지가 뒤틀린 몸, 달라붙은 왼팔, 절뚝이는 다리, 어눌한 말 한마디 뱉으려면 얼굴 전체가 일그러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까. 종일 엉덩이 한번 땅에 붙일 틈도 없이 자신보다 못한 이들의 손발이 되어 기꺼이 잔일을 도왔다. 이 땅에 정말로 천사가 존재한다면 바로 그녀가 아닐까.

종이 한 장에 떠나야 하는 게 공직자의 운명이다. 국제재활원 가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3년째다. 전보 기간을 넘긴 나는 대구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별을 고하던 날, 문정숙 원장님은 내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줄게 종이 한 장밖에 없다"며 눈물을 훔쳤다. 내가 여태까지 받은 여느 상장이나 표창장보다 소중한 선물이었다. 손발이 굳어 박수를 칠 수 없는 은연이는 옆에 서서 훌쩍이고 있었다. 들이굽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할퀴며 온몸으로 울던 그녀를 떠올리면 지금도 내 코끝이 아련하다.

세월이 꾸러미로 흘렀다. 1994년 방통대를 졸업하고 내부 고시를 거쳐 2급으로 승진한 나는 경북의 오지, 영양전화국장으로 부임했다. 맨 먼저 한 일이 『천사의 점빵』을 여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간식거리 외에도 비누, 샴푸 세제 등 간단한 생필품까지 확대했다. 그만큼 이문도 늘었다. 그런데 너무 오지이기 때문인지 그곳에는 중증 장애인 시설이 없었다. 숙고 끝에 내가 봉사활동을 하는 경산 고산의 자유재활원생과 그 자매 시설인 경산 남천의 만승근로복지관 원생을 초빙하여 하계 캠프를 열어주기로 했다.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평생 시설에 갇혀 지내는 그들이다. 얼마나 바깥세상이 그립겠는가. 청정한 산골의 자연 이 주는 쾌적함을 좋은 추억으로 그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다.

그해 여름, 영양군 수비면 송하리, 산 좋고 물 좋은 그곳에 폐교된 송하초등학교를 통째로 빌렸다. 그런 다음 관광버스와 직원들의 승용차를 동원하여 자유재활원생 250여 명과 만승근로복지관생 60여 명을 차례로 초청했다. 3박4일 동안 원생들의 숙박에 불편이 없도록 교실 바닥에 두툼한 스티로폼을 깔아 숙소로 사용했다.

몸놀림이 자유로운 원생들은 직원들과 어울려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 원생은 직원과 일대일로 짝을 지어 강에서 물놀이용 튜브를 타며 수영을 즐겼다. 밤에는 축제의 꽃인 캠프파이어로 흥취를 돋구었다. 그러자 천사들은 너무나 행복해했다. 별이 쏟아지는 야외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반딧불이를 보며, 자연 속에서의 휴식과 탐험을 즐기며 소중한 추억을 가슴에 마음껏 담았다. 3년째의 행사를 끝으로 지방 근무를 끝낸 나는 다시 한국통신 대구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7. 천상에서 온 메시지

코 묻은 아기들의 돌 반지까지 뽑아가던 IMF 외환위기가 세상을 휩쓸고 간 초하의 어느 날이다. 인사부장인 나는 기계직 한 사람 채용을 두고 본부장님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상명하복이 미덕이던 시절, 상관과의 다툼은 옳고 그름을 떠나 불충 그 자체였다. 겪어본 사람만이 그 고충을 알 수 있으리라. 입술이 부르트고 밥맛까지 잃은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새벽녘에야 설핏 풋잠이 들었다.

"형! 용기를 내. 그 친구를 꼭 도와줘. 공기업이 그를 외면한다면 대한민국 어딘들 그를 받아주는 곳이 있겠는가? 장애인에게 인권이 없다는 건 형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니"

천상에서 온 메시지였다. 눈을 뜨니 오래전에 하늘의 별이 된 동생은 온데간데없고 베갯잇만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인사부장, 이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불구를 뽑았어요? 성치 않은 팔로 보일러를 돌리는 일도 문제이거니와 회사의 이미지는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도끼눈을 한 본부장님의 얼굴과 천상에 있는 동생의 얼굴이 뇌리에 자꾸 갈마들었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혼란스러워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었다.

일주일 전의 일이다. 기계직(보일러공) 신입사원 한 명을 채용하기 위해 공채로 임용 후보자 3명을 뽑았다. 그런데 그중에 장애인을 1순위로 뽑은 것이 화근이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렇다. 장애인 전형 제도가 따로 없던 시절이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열네댓 사람을 상대로 면접시험을 치렀다. 그때다. '○동팔' 내 혼을 쏙 빼놓는 청년이 있었다. 자폐증을 앓은 그는 하늘의 별이 된 내 동생을 쏙 빼닮았다. 목발 신세는 겨우 면했으나 사지가 뒤틀린 몸, 절뚝이는 다리, 달라붙은 왼팔, 사시에다 말 한마디를 하려면 아랫입술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죽은 동생이 환생한 듯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 청년을 뽑은 연유는 분명했다. 내 동생을 닮아서가 아니다. 장애인이라는 동정심의 발로는 더더욱 아니다. 탁월한 업무능력과 반듯한 인품이었다.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으로도 응시가 충분한데 유일하게 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전문대학 학위도 응시자 중 혼자였다. 덤으로 용접기능사와 운전면허까지 갖고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해내기 어렵거늘, 불편한 몸으로 그 많은 자격증을 따자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어쩌면 세상이 짓밟는 인격에 대한 설움과 통한이 빚은 훈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렸다.

질문이 막힐 때마다 "뽑아만 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앵무새 같은 대답도 그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몸으로 지원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 인간 됨됨이가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면접관 전원으로부터 최상의 점수를 받아 당당하게 선순위로 합격했다.

벽은 따로 있었다. 본부장님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임용을 거부하고 재시험을 요구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본부장님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에 돈 몇 푼으로 때우면 된다. 우리 회사만 먼저 장애인을 고용하라는 법도 없다. 그것이 내가 갈등을 겪고 있는 이유다. 장애인 고용부담금 몇 푼 내는 걸로 장애인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건 법망은 피해 갈 수 있지만 분명 잘못된 편법이다. 그들의 고유한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비겁한 행동이었다.

잠을 자도 그 청년의 천사 같은 미소가 동생의 얼굴에 오버랩되어 자꾸 천정에 맴돌았다. 잠에서 깬 나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출근하기 무섭게 퇴짜 맞은 문서를 꺼내었다. 먼지만 톡톡 털고는 본부장님 앞에 다시 내밀었다.

"서명하십시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본부장님은 서류뭉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는지 살균되지 않은 칼날 같은 폭언을 마구 쏟아냈다. 장애인에 대한 '인권유린'이라고 맞서고 싶었지만 일을 그르칠 수가 없어 애써 참았다. 이쯤의 수몰로 한 사람일망정 장애인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열 번, 아니 백번도 참을 수 있었다.

설득도 하고 애원도 했다. 소용없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하지만 내게도 비장의 카드 한 장쯤은 남아있었다. "본부장님, 문밖에 보도 자료에 굶주린 기자들이 아우성들인데 '장애인 차별'이라는 기사가 온 매스컴을 도배질해도 괜찮겠습니까?" 공직자에게 좋지 못한 기사는 치명적이다. 보도라는 말에 꼬리를 내린 본부장님은 문서에 서명했다. 하긴 "임용 후 모든 책임은 당신이 지시오"라는 구두 단서가 따라붙긴 했었다.

별칭 '똥파리' 후일 동팔씨에게 직원들이 붙인 별명이다. 그 청년이 당시 7만 5천여 명이 종사하는 우리 직장에서 장애인임용 제1호였다. '보리밭에 길내기'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 그 임용을 시작으로 지금 KT 산하에는 300명에 가까운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일하고 있다. 처세와 정의는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직과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처세술임을 그때 알았다. 물론 내가 한 일이 태산의 출발인 티끌에 불과함을 안다. 하지만 처음 물꼬를 틔웠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가슴이 뿌듯했다. 장애는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함께 풀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제2 인생을 살고 있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라 법에는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민간 기업도 종사자의 3.1%를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고용부담금으로 때우는 철면피 같은 기업도 있다. 일부러 장애인들과 거리를 두고자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권리까지 박탈하며 복지라는 이름으로 시설에나 가두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모두 한 번쯤 되짚어볼 일이다.

임용은 시작에 불과했다. 동팔씨가 그토록 어렵사리 발령을 받고 일을 시작한 지 두어 달이 흘렀을까.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든 풍문이 마실 나온 수탉처럼 사무실 이곳저곳을 나돌아 다녔다.

"공직에 불구를 채용하다니, 쯧쯧! 달라붙은 저 손으로 어찌 보일러를 돌린단 말인가? 이제 따습게 지내기는 다 틀렸네 그려. 뒷배가 인사부장이라나 뭐라나……."

여기저기 직원들이 쑥덕거렸다. 해가 바뀌어도 동팔씨를 동료 직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도 분명 '기계실 주임'이라는 직함이 있지만 하나같이 '똥파리'로 불렀다. 이 얼마나 고약한 호칭인가. 방열기 노후로 사무실이 가끔 추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낡은 시설을 탓하는 직원은 없었다. 보일러 운용 능력을 문제 삼아 수시로 동팔씨를 강아지 부르듯 불러 닦달했다. "왜 하필이면 장애인을 뽑아 우리를 떨게 하느냐?"고 내게 책임추궁을 하는 것으로 들렸다.

직원들이 하나같이 모질게 굴어도 동팔씨는 속도 없는 듯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동안 사회에서 받은 괄시와 천대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습관처럼 몸에 익은 그 친절과 찔레꽃을 닮은 환한 미소는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의태요 보호색이라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소문에 시달린 나는 그를 신뢰한 내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종종 보일러실을 돌며 동정을 살폈다. 몸이 성한 사람만큼 일하자면 갑절로 움직여야 함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시도 책상에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비번마저 반납하며 기름치고, 닦고, 조이며 기계에 매달렸다. 그 덕에 모든 밸브는 반짝반짝 빛이 났고, 보일러실 바닥은 떨어진 밥풀을 주워 먹어도 될 만큼 반질거렸다. 누가 보든 말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나를 안심 시켰다.

"동팔씨! 몸이 그렇다고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장애는 좀 불편할 뿐이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직원들의 무례한 요구에는 당당하게 대처하세요."

지나치게 몸을 낮추는 모습이 안타까워 나는 수시로 사람으로 아프고, 사람으로 뒤척이는 그를 다독였다.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동팔씨가 직무교육을 갔다. 불 때는 일은 이웃국에서 파견된 직원이 대신했다. 그는 숙련공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보일러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굴뚝이 날아가고 집채 같은 주철제 섹션보일러가 폭삭 내려앉았다. 그 바람에 전 직원이 동태가 되어 일주일을 떨어야 했다.

"그럼 그렇지, 외팔로 어찌 제대로 된 정비를 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듯 사무실이 술렁거렸다. 물론 직원들이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은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곧바로 감사가 뜨고 사고 경위 조사가 이루어졌다. 결과는 이외였다. 운용자의 안전 수칙 미준수로 밝혀졌다. 당시 주철제 섹션보일러는 점화전에 십여 분 통풍을 시켜 밤새 고인 가스를 불어내야 했다. 그런데 늦은 출근으로 시간에 쫓긴 기사가 바로 점화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조사 과정에서 업무에 충실한 동팔씨의 진실이 밝혀져 그해 '숨은 일꾼'으로 발탁되어 표창까지 주어졌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보일러 사고를 계기로 우리 일터에는 장애인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아니 확 바뀌었다. 색안경을 끼고 보던 본부장님도 직원들도 동팔씨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똥파리'라는 걸레 같은 호칭도 '○주임'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체득한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직장은 오히려 몸이 불편한 그들을 먼저 챙기는 살가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제 AI가 시 짓고 소설 쓰는 시대가 아닌가. 불 때는 일을 용역기관에 넘긴 동팔씨는 또 다른 업무를 맡아 아직도 현직에서 남다른 정열로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업무능력이나 직무 역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내 삼촌이 그랬고, 동팔씨도 그랬다. 단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은 무시당하고 취업까지 거부당하고 있다. 취업이 어려우니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해 생활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그들을 우리의 품으로 끌어들여 함께 한다면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한국의 모든 기업인이여! 장애인 고용에 주저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결코 돈 몇 푼을 바라지 않는다. 비장애인과 함께 차별 없이 일하는 것이 꿈이다. 세계적인 포도주의 소산인 일본의 '코코 팜 와이너리'를 움직이는 장인들도 모두가 지적 장애인이다. 가깝게는 세계적인 오페라로 뜨고 있는 우리나라의 '한빛예술단'의 모든 연주자도 시각장애인이다. 이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구분 없이 어우러져 동행하는 지혜의 문이 열릴 때 우리 사회 역시 진정한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8. 『천사들의 점빵』 문을 닫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했던가. 2002년 3월 22일 정부 투자 기관이었던 한국통신은 『KT』라는 개명을 시작으로 민영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구조 조정을 위한 예고편이었다. 외환위기의 후유증이리라. 한창 일할 나이에 벌이터를 잃고 파란 낙엽으로 나뒹구는 실업자들이 하릴없이 공원 벤치를 지키고 있을 때다. 나는 다행히 IMF라는 칼바람은 비켜 갔으나 어느덧 30년을 훌쩍 넘긴 공직 생활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2005년 1월 1일 나는 KT 경주지사장으로 마지막 승차를 했다. 지방 근무 역시 마지막이다. 주요 기관을 돌며 부임 인사를 마친 나는 여느 때처럼 시청 복지과에 전화를 걸었다. 중증 장애인이 거주하는 시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강동에 있는 『예티쉼터』를 추천해 주었다. 어디 누구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함구했다. 봉사는 떠벌리고 하는 일이 아니다. 『천사들의 점빵』에 대하여 미리 소문을 들은 총무과장님은 휴게실 간판을 내리고 서둘러 점빵 문을 열었다.

직원들은 나를 두고 지사장이 아닌 점빵장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 호칭이 싫지 않았다. 팍팍한 세상에 떳떳한 돈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전화국 건물에 세 들어 사는 국민연금 경주지점 식구들까지 2백수십여 명의 직원들이 이용하자 수익금의 규모도 상당했다.

집도 사람도 예쁜 『예티쉼터』는 경주의 끝자락 강동면 왕신리,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담한 쉼터에는 원장님인 정의호 목사님 내외와 스무 명에 가까운 지적 장애인(뇌성마비, 다운증후군, 자폐증, 학습 장애)들이 주로 포스코의 도움을 받아 한 가족처럼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었다.

침구와 옷가지 등 세탁물을 빨아 널고, 원생들을 목욕시키고 나면 자신의 짝꿍과 놀이에 들어간다. 내 짝은 둘이었다. 뇌성마비를 앓은 삐돌이와 자폐증을 앓아 소리를 잃은 곰탱이다. 물론 호칭은 내가 선물한 닉네임이다. 오전에는 실내에서 삐돌이의 말벗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다가 끼니때가 되면 밥을 떠먹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오후에는 곰탱이의 손을 꼭 잡고 야외에서 산책했다.

작은 일에도 잘 토라지는 삐돌이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겼으나 번데기처럼 오그라든 몸은 네댓 살배기 아이처럼 가볍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다. 그래도 언어 구사만은 자유롭다. 도우미들이 반말투로 아이 취급을 하거나 성의 없이 밥을 떠먹이면 입을 벌리지 않는다. 말을 할 수 없는 아기가 뱉는 행위로 어른을 꾸짖듯이 그들은 다문 입으로 봉사자들의 오만을 꾸짖는다.

언제나 느긋한 곰탱이는 스무 살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청년이다. 하지만 생각이 없다. 팔랑개비를 손에 쥐어 주면 몇 시간이든 그것만 돌린다. 하지만 훌훌 옷을 벗을 때는 미모사다. 목욕 시간에 내가 잠시라도 방심하면 알몸으로 뛰쳐나가 주위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뜻하지 않은 누드쇼에 기겁하던 여직원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나를 혼자 웃게 만든다.

그들과 함께 호흡한 지 2년여, 내게 대구에 있는 KT 협럭사로 자리를 옮기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아쉽지만 지방 근무 때마다 분신처럼 달고 다녔던 『천사들의 점빵』도 경주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산책 시간에 꼭 잡은 곰탱이의 손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가 그립다.

9. 에필로그

자원봉사란 언어 그대로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일이다.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일이라 그런지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배가 된다. 그래서일까. 콩나물 장사로 번 전 재산을 흔쾌히 장애인 시설에 보내는 할머니도 있고, 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회사원이 월급의 절반을 장애인 시설에 꼬박꼬박 보내오는 아름다운 손도 있다. 봉사는 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얻은 교훈이다. 봉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참맛이리라. 돌이켜보면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내 자신이었다.

영국의 정치가 처칠은 "우리는 일함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어쩌면 몸이 불편한 그들은 나눔을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을 꾸짖기 위해 천사가 변신하여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손발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다르다는 편견과 선입견부터 버려야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잠재적 장애인이 아닌가.

나이 들어 유모차를 끌면 그 또한 장애인과 다름이 아닐 터. 육신을 파괴하는 온갖 불의의 사고 역시 언제든 누구나 당할 수 있다. 어디 내 가족만이 가족이고 내 밥만이 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몸이 불편한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정화를 위해서라도 꼭 한 번쯤 재활원의 자원봉사를 권하고 싶다.

피할 수 없는 것이 흐르는 세월이고 쌓이는 게 연륜이라고 했던가. 어느덧 인생의 겨울이 성큼 내 발목을 적시고 있다. 공직에서 함께라는 이름으로 평생 그들과 나눔의 꽃을 피우던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은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몇몇 천사들을 상대로 『소리 책방』이라는 작은 독서회를 꾸려 글쓰기 재능 기부로 위로의 손길을 이어가고 있다.

언젠가 인생 소풍을 끝내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날 동생 앞에 뜨뜻한 형이 되고 싶다. 나이 탓이리라. 잠시 머물고 가는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남겨야 할지를 고비샅샅 톺아본다. 생각하는 건 뜻으로 닦는 일일 터. 들꽃 같은 천사들에게 작은 사랑의 열매 한 톨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리. 오늘도 나는 살포시 『천사들의 점빵』문을 가슴으로 얼고 있다.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무섭노' 발언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며 전체주의적 검열 사회를 경고했다. 해당 발언은 리센...
미국과 이란 간 전쟁 직후 담합을 통해 유가를 폭등시킨 혐의를 받는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 직원들이 기소되었다. 서울중앙지검에 따르면,...
광주 군 공항 부지에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정부 발표에 대해 대구경북 지역의 실질적인 지원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며, TK...
캐나다 정부가 차세대 잠수함 도입 사업에서 독일의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TKMS)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으며, 사업 규모는 최대 60조 원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