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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해산령 밤길을 걸으며/ 장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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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장준문 님.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장준문 님.

'금강산 가는 길'

건물 앞 길가에 세워놓은 커다란 형광빛 입간판에 이렇게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창밖으로 풍기는 찌개 냄새에 이끌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애초의 일정은 얼마간 더 걸어 방산면 소재지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어둠이 깊어진 데다 온몸에 젖어 든 피로와 시장기로 더 이상 발걸음이 내디뎌 지지가 않았다.

창가 식탁에는 중년의 두 남자가 벌겋게 빠글거리는 찌개 냄비를 사이에 두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생각을 다듬을 겨를도 없이 시큰거리는 엉덩이를 등받이 의자에 털썩 내려뜨렸다. 남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여주인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여주인은 의아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방산이라고 했다.

한쪽 벽에는 '찌개백반'이라고 적힌 종이쪽지가 입춘방처럼 삐딱하게 붙어있었다. 식사로는 그것뿐이라 달리 고를 것도 없었다. 얼마간 지나 여주인은 펄펄 끓는 찌개 뚝배기를 중심으로 깍두기와 고추 무침 따위 밑반찬 몇 가지를 식탁에 놓아 주었다. 장시간 도보에다 점심 먹은 지 일곱 시간가량이나 지났으니 천천히 맛을 음미할 계제는 아니었다.

"낭만적이십니다."

벙거지 모자에 배낭을 메고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사나이가 궁금했든지 창가의 좀 투박해 보이는 사람이 북쪽 느낌의 억양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점심 무렵 해안 펀치볼을 출발해 지금 막 도고령을 넘어왔노라고 말했다. 며칠 전 고성 통일전망대에 들렀다가 간성에서 1박한 후 동해안 대대리를 출발하여 '휴전선 따라 걷기 국토횡단' 3일째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들은 뜻밖이라는 듯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좀 훤하게 생긴 또 다른 사람은 본가가 간성이라며 내 얘기에 상기되는 듯했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 투박해 보이는 김 씨라는 사람이 비운 소주잔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사양했다. 자고 나면 다시 이어질 도보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잠자리에 누워서는 심하지만 않게 마시며 그들로부터 휴전선 접경지역의 일상에 관한 얘기나 좀 들어볼 걸 하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들은 민통선 안쪽에서 철책선 보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옛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물 맑고 풍광이 수려한 두타연을 거쳐 전방 철책선을 오르내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나 볼 수 없는 좋은 경치를 보며 하는 일에 만족해했고 분단의 최전선에서 나라를 위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 순간 도고령을 넘으며 아쉬움을 곱씹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휴전선 따라 걷기'는 당연히 분단의 최전선을 걷는 것이다. 그런데도 해안 펀치볼로부터 돌산령 터널을 빠져나와 만난 월운리 갈림길에서 두타연 방향을 택하지 않은 것이 내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실은 갈림길에 그쪽 길의 통행에 관한 구체적인 안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 무작정 들어섰다가 중도에 되돌아 나올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였다.

실제 그로부터 며칠 후 그런 일이 있었다.

아침에 철원 김화에서 출발해 남대천을 따라 걷다가 청양리에서 문혜리와 도창리 방향의 T자형 갈림길을 만났다. 거기에도 어떤 안내도 되어 있지 않아 당연히 최전방인 도창리 쪽을 택했다. 그러나 한 시간가량을 걷던 중 경계병들의 제지에 가로막혔다. 하소연하듯 사정을 말해 보았지만 최전방의 막중한 경계 상황에 그런 사정이 통할 리 없었다. 옛말에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했듯 피로도 풀 겸 야전 막사 옆 둔덕에 앉아 가방에 넣어 둔 김밥 하나로 점심을 때우며 되돌아갈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민통선 안쪽 도창리에서 나오는 버스로 되돌아 나왔는데 그럭저럭 두 시간 반가량을 엉뚱한 곳에서 허비하고 말았다. 그러나 매사는 생각 나름으로 다소 피로가 가중되고 시간이 걸렸지만 그 구간을 걸어 본 것도 아주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좀 투박해 보이는 김 씨는 철책선 작업 중 가끔 북한 순찰병들을 본다거나 고라니를 떼로 보았다는 등 자기들만이 아는 얘기에 신이 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주었다. 전쟁 당시 남북 어느 쪽인가를 겨냥했을 파랗게 녹슨 소총 탄환이었다. 비록 조그만 것이었지만 분단의 상징물로서 국토횡단을 반추할 물건이라 '휴전선 따라 걷기'를 마친 후 작업실 책상머리에 놓아두었다.

간성의 강 씨는 철책선 작업을 얘기하던 중 갑자기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 부근 안변이라는 곳이 원 고향이라고 했다. 겨우 다섯 살이던 어느 날 전쟁이 터지면서 아버지의 목선을 타고 잠시 피신 차 내려왔다가 그만 올라가지 못하고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집에 남은 어머니와 두 돌이 갓 지난 여동생과는 그 길로 생이별이 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멀리 가지 못하시고 간성에다 터를 잡으셨어요."

그는 젊은 시절엔 속초에서 작은 회사에 다니다가 철책선 일로 바꾸었다고 했다.

"산 위에서라도 어머니가 계시는 북쪽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에 철책선 일을 시작했지요."

어린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을 어렸던 그가 알기나 했을까만 지금 휴전선 능선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어떨까. 잊은 듯 살면서도 가슴에 아픈 덩어리 하나를 품고 사는 그의 한은 또 오죽할까?

"나이를 먹으니까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서…. 허허!"

얘기를 이어가던 강 씨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게 민망했던지 갑자기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전날 가칠봉 을지전망대에 들렀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가칠봉은 해안 펀치볼을 포란형으로 둘러싼 봉우리로 남북 간 중요한 경계선이다. 전망대에는 도보로는 갈 수 없기에 양구통일관 관장의 도움으로, 현역 때 근무했던 을지전망대 관리부대를 찾아왔다는, 왜관에서 온 젊은 사람들의 차에 동승해서 올라갈 수 있었다. 을지전망대에서는 금강산이 손에 잡힐 듯 보였는데 대체로 해금강 쪽이 보이는 고성 통일전망대에서의 경관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북쪽을 바라보며 잠시 젖었던 감상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부서져 사그라지고 있었다. 쉽지 않게 바라본 북녘 산하의 느낌 한 자락이나마 챙겨 두려고 은밀히 카메라에 담은 휴전선 저쪽 풍경 몇 컷은 나오던 중 관리 장교로부터 모두 삭제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눈길 닿는 곳뿐일지라도 휴전선 능선에서 항상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북녘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강 씨에게는 부럽다는 말조차 오히려 예가 아닐 듯했다.

허기를 해결하고 나니 잠잘 곳이 문제였다. 식사를 한 후 방산리로 가야겠거니 하며 여주인에게 물어보니 방산리에는 여관이 없고, 마침 노동자들이 쓰던 식당 방 하나가 비어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금강산 가는 길'은 철책선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는 곳이었다. 애초의 일정계획은 방산리까지 걷는 것이었으나 너무나 지친 상태라 좀 불편하더라도 식당 방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이른 아침 기상하니 강 씨와 김 씨가 보이지 않았다. 여주인은 그들은 이미 철책선으로 출근했다고 말했다. 아직 일곱 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럴 수가! 잠시 스친 인연이지만 작별 인사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잘 자고 갑니다."

여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이른 아침 식당을 나섰다. 화천 풍산리까지는 온종일 걸릴 거리라 잠시라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또다시 사타구니 서혜부가 심하게 뻐근하고 무릎과 발목도 어김없이 시큰거렸다. 아침 출발 때면 늘 있는 현상이나 한 시간가량 걷다 보면 조금씩 풀리긴 한다.

큰길로 올라와 얼마간 걸어 삼거리를 만났다. 거기서 북쪽으로 가면 철책선 노동자들이 오르내린다는 두타연 쪽으로, 분단 전 서울을 떠난 남쪽 사람들이 금강산을 오가던 길이다. 그래서 삼거리 가까이 있는 식당 '금강산 가는 길'은 그런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겠다.

아침 산새 소리가 부산스러운 가을 길엔 맑은 하늘로부터 금빛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앉았다. 왼쪽 길가에 '화천 58km'라고 적힌 나지막한 이정표가 보였다. 상의 안주머니에 접어 넣어 둔 지도를 꺼내보았다. 지도상 고방산에서 화천읍에 조금 못 미친 풍산리까지는 어림잡아, 첫날 동해안 간성읍에서 출발해 진부령을 넘어 인제 원통까지 걸었던 52킬로미터 정도에 버금가는 거리일 듯하다. 중간쯤에서 평화의 댐을 만나는데 댐을 지나서부터 풍산리까지는 주변에 마을 하나 없는, 온통 꼬불꼬불한 고갯길로 이어져 있다. 아마 전국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난코스 중 난코스라 단단히 각오를 다져야 한다.

금강산 가는 길 삼거리를 지나자 옆으로 자그마한 내가 흐르고 있었다. 두타연에서 흘러내리는 수입천이라는 북한강 지류로 파로호로 흘러드는 물길이다. 이른 아침 물소리를 들으며 내를 따라 걸으니 사타구니와 무릎 통증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다소 가벼웠다.

송현리, 장평리 등을 스쳐 지나 방산면 소재지에 이르렀다. 지난밤 예정대로 방산리까지 걷지 못한 걸 후회했으나 햇빛 밝은 아침 걸음에도 만만한 거리가 아니니 부질없는 후회를 한 셈이었다.

방산면 사무소에서는 일찍 출근한 부지런한 직원들이 옆 뜰에서 낙엽을 쓸고 있었다. 이런 접경지역 공무원들은 후방의 그들과 정신 자세에서 어떻게 다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면사무소 앞을 지나 다시 한참을 걸어 오미리 주변에서 작은 갈림길을 만났다. 고방산에서 오미리까지는 이 지역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평지로 이어지더니 평화의 댐 방향으로 접어드는 오미리 갈림길에서부터는 다시 완만한 고갯길이 시작됐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쉼 없이 걸어, 강원도 터널치고는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는 1,300미터가량의 오천터널을 통과했다. 뱃속에서는 또다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허기가 시작됐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미련스럽다. 가게가 있는 방산면 소재지를 지나고서도 꼭 닥치고 나서야 김밥 한 덩어리라도 넣어 올 걸 하며 후회하는 버릇이다.

휘며 꺾어 내리는 천미계곡을 지나던 중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미리 고갯길 초입에서 검은 승용차 한 대가 평화의 댐 가는 길을 묻고 지나간 이후, 아침나절인데도 지나는 사람이나 차량을 본 적이 있었나 할 만큼 인적이 없었다. 양구읍 쪽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주도로인데도….

끝없이 이어지는 밋밋한 길에 지칠 즈음 짧은 터널 하나가 나타났다. 양구와 화천 간 경계 지점임을 알 수 있는 양화터널. 그리고 또 하나의 짧은 터널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터널 이름만으로도 평화의 댐에 다다랐음을 직감할 수 있는 평화터널이었다. 진입 전 이미 뻥 뚫린 터널 저쪽, 커다란 아치형 종루가 눈에 확 들어왔다.

짧은 터널을 벗어나자 거대한 댐 제방과 검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시원한 경관이 눈앞에 펼쳐있었다.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중간 기착지인 평화의 댐에 도착했다. 그런데 무언가 뜻밖이었다. 관광객들로 붐빌 것으로 예상한 한낮의 공원은 중년 여성들 서넛이 서성일 뿐 산중처럼 고요했다. '평화의 댐' 표지석과 부조 장식물 따위 눈에 들어오는 대로 건성건성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한 눈으로는 식당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식당일 만한 건물은 보이지 않고, 하나뿐인 자그마한 매점마저 문에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평화의 댐에 도착하면 찌개 냄새 풍기는 식당가에 사람들이 북적이리라는 생각으로 주린 배를 참으며 걸었는데 이럴 수가!

'세계 평화의 종' 종루 뒤쪽 가장자리에 오뚝 서 있는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작은 유리창을 열며 주부로 보이는 안내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내원에게 어디 식사할 곳이 없느냐고 물으니 식당은 원래 없고 월요일이라 매점도 열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강원도, 아니 대한민국 대표 안보 관광지 중 하나인 평화의 댐에서 식사를 할 수 없다니. 그러고 보니 관광안내소를 제외하고 주변의 DMZ아카데미나 물문화관 등 모든 시설들이 문이 닫혀 있었다. 당일이 월요일이라는 것조차 안내원으로부터 듣고서야 알았다. 사전에 대략적 상황 파악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준비를 건성으로 한 걸 또 자책했다. 고방산 숙소에서 아침 일곱시 경 식사를 했으니 이미 시장 끼는 견디기 어려운 지경인데, 주변에 인가 하나 없는 길고 긴 해산령을 넘자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안내원이 자신의 플라스틱 의자를 권했다. 간단한 의례와 함께 지친 몸을 플라스틱 의자에 풀썩 걸터앉았다. 그녀는 또 고맙게도 서랍에서 사발면 하나를 꺼내 이거라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평소라면 웬만하면 사양하겠지만 감지덕지, 체면 차릴 상황이 아니었다. 전기포트로 끓여 준 물을 부어 면이 대충 익자 허겁지겁 국물까지 비웠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빈속 아랫부분만이라도 채우고 나니 조금은 기운이 나고 눈에 생기도 도는 것 같았다.

관광 안내원은 화천군 문화해설사로 주당 4일은 감성마을 이외수문학관에서, 이틀은 평화의 댐에서 봉사한다고 했다. 그녀는 문화해설사답게 청정한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화천의 자랑거리들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뚜우웅~~~'

안내소를 나서려는 순간 한낮의 적조를 깨트리는 큰 소리가 댐 공간에 울렸다. 돌아보니 세계평화의 종 종루에서 거대한 범종이 느린 몸짓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댐 주위를 서성이던 여성들이 새해맞이 재야의 종에서 본 것처럼 줄에 매달린 커다란 당목 둥치를 부여잡고 타종을 하고 있었다.

'뚜우우웅~~~'

범종이 다시 울렸다. 종소리는 긴 맥놀이를 이끌며 호반 산록의 단풍 숲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맥놀이 여운을 들으며 범종을 둘러보던 중 아래에 양각으로 새겨진 설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평화의 종은 세계의 분쟁 종식과 평화와 생명을 기원하는 의미로 분쟁을 겪었거나 분쟁 중인 나라들에서 수집한 탄피 1만관(37.5톤)으로 높이 5미터, 폭 3미터 규모의 범종을 만들었다. 거기에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고자 1만관 중 9,999관으로 종을 주조하고 남북통일의 날 나머지 1관을 추가하여 세계평화의 종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범종 위 용뉴 부분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네 마리를 사방으로 배치했는데 그중 한 마리는 한쪽 날개가 잘려진 상태였다. 이 잘린 날개가 통일의 그날 완성될 1관의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안내원과 평화의 댐이나 접경지역에 위치한 화천의 인문과 자연 등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흐른다는 걸 잊고 말았다. 안내원에게 화천읍 방향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아흔아홉 구비 해산령을 넘어야 해요."

해산령은 이만저만 난코스가 아니라는 건 지도를 보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안내원의 말에 새삼 부담이 느껴졌다. 안내원도 남 일 같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비목공원은 아래쪽에 있다기에 내려가 한 바퀴 둘러본 후 거기서 바로 출발할 요량으로 안내원에게 인사를 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내리막 중턱엔 비목공원 상징 조형물이 서 있었다. 화강석으로 씌워진 대칭형 주 탑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 좌대엔 아기를 안은 여인과, 소총을 든 반라의 젊은 용사의 청동상이 각각 서 있는 구성이었다. 아마 '비목'의 노랫말처럼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묻힌 무명용사의 충용정신과, 그를 잉태하고 품어 온 조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주 탑의 화강석 표면에는 비둘기 몇 마리가 선조로 새겨져 있고, 조형물 양쪽 둘레에는 어릴 적 운동회 날 휘날리던 만국기처럼 좌우에 각각 태극기와 유엔기를 필두로 6.25 참전 16개국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니 비목공원은 댐 가장자리 길가에 있었다. 마치 흰바우산白巖山 계곡 양지 녘에 쓸쓸히 선 그 노랫말 속의 비목처럼 공원이라 하기엔 좀 허허로운 느낌이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비목' 시비를 비롯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형물들을 둘러보며 흥얼거려 보았다. 슬픈 노랫말에서는 포화가 빗발치는 전선 계곡에서 먼 고향 가족과 초동 친구를 그리며 고통 속에 숨져 갔을 병사의 비애와 한이 새삼 느껴졌다. 그 무명용사의 한에의 공명인 듯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아래로부터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기 전인 1960년대 중반 어느 날, 한명희라는 2기 ROTC 출신 청년 장교가 흰바우산 계곡에서 녹슨 철모와 돌무더기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어쩌면 하나의 에피소드로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일일 텐데 그 순정純正하고 분별력 있는 청년 장교로 인해 이 주옥같은 가곡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 청년 장교는 전역 후 TBC 동양방송 PD로 일하던 중 장일남 작곡가로부터 이 곡에 쓸 노랫말을 의뢰받고 백암산 비목의 기억을 떠올려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공원을 거닐면서 이처럼 감동적인 '비목'의 현장을 전해 준 그분과, 거기에 잘 맞는 옷을 입혀준 장일남 작곡가님께 내심으로나마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했다.

비목 시비를 뒤로하고 도로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 '검문 중'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철모 군장에 완장을 찬 병사들이 막아섰다. 북쪽 방향의 민통선 검문소였다. 지친 몸으로 평화의 댐 곳곳을 두어 바퀴 돌다 보니 머릿속의 방향 계기가 제멋대로 작동해 버린 듯했다. 평화의 댐이 휴전선 가까이에 있다는 건 짐작은 했지만 댐 바로 옆에 민간인 통제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평화의 댐 북쪽 길을 막아선 민통선 검문소. 분단의 현장은 실재적이었다. 평화의 댐은 남북을 잇는 북한강 물길의 남쪽 통제선이다. 북쪽 어느 골짜기에서 발원해 흘러내린 물은 이곳 평화의 댐 거대한 제방에 의해 통제되어 버렸다. 순간 머릿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기억 하나가 일었다. 20여 년 전 북의 금강산댐 물 공격을 막겠다고 온 국민이 벽돌 한 장, 모래 한 줌 어치의 돈을 모아 만든 것이 이 평화의 댐이었지. 당시 북한이 짓기 시작한 임남댐 물이 채워져 어느 날 폭파하면 서울의 63빌딩 절반이 물에 잠긴다고 신군부 정권에서 허풍을 떨던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그렇다. 여기 댐을 채운 물은 하늘에서 내리고 땅에서 솟아 강토를 적시는 자연의 물이기보다는 지구상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물인 것이다.

이곳 평화의 댐에서 잠시 멈추어 호흡을 가다듬은 북쪽의 물은 조금씩 흘러 파로호로 흘러들고, 다시 느린 걸음으로 이어내려 서울의 동쪽 양수리에서,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남한강 물과 한 몸이 되어 거대한 한강을 이룬다. 그렇게 한강은 남과 북의 물길이 하나로 이어져 이 조국산하를 생동케 하는 국토의 대동맥이 되는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선 작은 상상의 조각들이 부나비처럼 일었다. 이 계곡 잔 물고기들은 산란하고 부화하며 물길 따라 자유로이 남과 북을 오르내릴 텐데. 북쪽 물고기들은 이 물길의 통제선을 넘어 양수리에서 남한강의 동족들과도 반가이 해후할 텐데….

아참! 떠나야 한다. 뒤섞이는 생각 중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띠이잉~' 하고 울렸다. 깜박 생각에 골몰한 사이 휴대전화기 속 시계는 벌써 오후 세 시 반에 가까워 있었다. 갑자기 급해지는 마음에 허겁지겁 오르막을 되올랐다. 관광안내소 쪽문으로 안내원에게 재차 인사를 하고 평화의 댐을 출발했다. 세시 25분이었다. 한 시 15분 경 댐에 도착했으니 두 시간을 넘게 평화의 댐에서 어떻게 흘러버렸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버린 것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풍산리까지는 가야 하는데 아흔아홉 구비 해산령을 넘자면 너무 늦어버린 시각이었다. 이미 낭패지만 더 낭패스러운 해산령 고갯길이 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서둘러 화천 방향의 길목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에 헐겁게 걸쳤던 배낭을 양쪽 어깨에 단단히 추스르고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화의 댐' 표지석을 뒤로하고 댐 제방 위 도로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고방산에서부터 걸어 온 460번 지방도 평화로였다. 제방 중간쯤에서 잠시 멈추어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름처럼 평화로운 댐 수면에는 고요히 잔물결이 반짝이고 강을 따라 멀리 상류를 바라보니 자하紫霞 빛 능선들이 첩첩이 아름답게 펼쳐있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보이는 북쪽의 능선들도 실은 이미 묵어 빠진 이데올로기라는 바이러스로 감염된 멍든 강토일 뿐이라는 생각에 가슴 속에선 분기만 일었다.

댐 제방을 벗어나 해산령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국토횡단 첫날 길고 긴 진부령을 넘고 해안 펀치볼에서 2,995미터의 돌산령 터널을 지나고 해 저문 도고령을 넘었는데, 지금 시작되는 해산령은 긴 터널과 굴곡 심한 고갯길로 이루어 진 그 종합 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걷지 않아 대붕터널에 연이어 재안터널을 지났다. 재안터널은 오른쪽에 주봉이 보이는 재안산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겠다. 지도상 왼쪽에는 1,190미터의 '일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가 뜨는 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러고 보면 해산령은 '일산의 고갯마루'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는 '일산령'이라 할 것을 옛날 이두처럼 일日을 순우리말 '해'로 표현한 것이다. 참 독특하고 아름다운 작명이다. 기왕이면 주봉인 '일산'도 '해산'이라 할 것을….

좌로 우로 휘고 꺾고 오르고 내리고를 거듭하며 걷는 해산령 고갯길. 아주 드물게 차량 한두 대 스쳐 지날 뿐 인적조차 없는 적막한 고갯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쉼 없이 고개를 오르자니 경사가 가파른 모퉁이길 가장자리에 자그만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평화의 댐을 떠난 후 처음 보는 건물이라 그마저 반가웠다. 네 개의 기둥에 지붕을 얹은, 요즘 아파트 단지 같은 데서 흔히 보이는 원두막처럼 생긴 건물로 이마에는 '해산전망대'라는 편액이 붙어있었다. 인적이 없으니 그 스스로 고적해 보이는 전망대 벤치에 걸터앉았다. 다섯 시 25분. 평화의 댐을 떠나 꼭 두 시간이 흐른 시각이었다.

늦가을이라 벌써 전망대 주위의 산그늘엔 어둠이 내리고 멀리 바라보이는 능선 위 노을도 검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친 걸음에 시장기도 극에 달해 배낭 속에 아껴둔 자유시간 하나와 작은 감자칩 한 봉지로 허기를 달랬다. 이제부터는 아무리 허기가 져도 풍산리까지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5분가량을 쉬었다가 다시 힘겹게 일어났다. 며칠간의 도보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이런 상황에서는 몇 개의 동전마저도 무게로 느껴진다. 사전에 모든 휴대품을 최소화 했지만 그마저도 부담이 됐다. 필수품인 배낭도 멜빵 어깨 부분에만 살짝 패딩이 있을 뿐 몸체는 홑 천으로 고작 150그램가량인 걸로 준비했다. 내용물도 최소한의 세면도구와 간단한 필기 용구, 그리고 무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급형 카메라 하나가 전부였다. 지도도 해당 지역 페이지만을 컬러 복사해 이어 붙여 만들었다. 어느 외국 도보 여행자의 경험담에 지도의 종이 무게마저 부담스러워 여행 중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도려내 버렸다고 했는데, 나는 아예 출발 전 그렇게 준비했다.

터덜터덜 걸어 오르던 중 오른편 길가 언덕 위에서 축대 공사를 하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평화의 댐을 떠난 후 처음 보인 사람들이라 내심 반가웠지만 말을 걸자니 왠지 실없다는 생각에 곁눈질만으로 스쳐 지났다.

끝없이 휘어 오르는 해산령에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목에 건 카메라도 어둠 속에서는 무용지물이라 아예 배낭에 넣어 버렸다. 평화의 댐 출발 후 풍산리까지는 아직 절반을 걷지 못한 지점에서 벌써 어둠이라니…. 평화의 댐에서 꾸물거린 게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후회를 곱씹으며 그저 힘닿는 대로 걷는데 마침내 저만치에 흐릿하게 터널 입구가 나타났다. 해산터널이었다. 조금 더 올라 터널이 가까워지면서 오른쪽 숲속에 반가운 불빛 하나가 보였다.

여섯 시가 조금 넘어서 터널 입구에 도착했다. 11월 중순의 여섯 시는 이미 밤이다. 거리를 가늠해 보니 아침에 고방산 출발로부터는 대략 4분의 3정도는 걸어 온 것 같았다.

국토횡단 노선 중 어느 곳과도 비교를 허하지 않는 해산령인데 그중에서도 어스름 속에 마주한 해산터널은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통과 전 일단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도로 옆 풀섶에 푹 무질러 앉았다. 반쯤 누운 채 올려다본 하늘에는 초아흐레쯤으로 보이는 마늘쪽 같은 반달이 새침하게 떠 있었다.

오른쪽 숲속에 보이던 빛은 '해산령 쉼터'라고 세로로 쓰인 광고판의 불빛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민가는 보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방산면 소재지를 지나 고갯길 초입 부근의 오미리 마을 이후로는 민가를 본 적이 없는 듯한데 적어도 평화의 댐 출발 이후로는 처음 보는 집이었다. 이 높은 해산령 꼭대기 어두운 숲속에 웅크리고 앉은 외딴집은 마치 중학교 때인가 읽었던 허 아무개 작가의 소설 '임꺽정' 속에 나오는 고갯길 외딴 주막을 연상케 했다. 요즘 시대에 이런 첩첩산중에 외딴 쉼터가 있다는 게 놀랍고 쉼터를 운영하는 사람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쉼터를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는 배고픔의 생리적 욕구와 시간 관계로 참아야 한다는 자제심이 마구 엇갈렸다. 아침 일곱 시경 식사를 한 후 밥 구경을 못 했으니 풍산리까지 가자면 속을 좀 채워야 한다. 아니, 풍산리까지는 두 시간가량은 걸릴 텐데 도착시간을 생각하면 힘들지만 참고 가는 게 낫겠다. 그래도 긴 긴 고갯길을 걷자면 최소한의 에너지는 필요할 것 아닌가. 그러나 식사를 한다 해도 준비시간 포함해 적어도 30분가량은 걸릴 것이니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아니, 휴게소에 식사가 되기나 하는지. 들어가서 알아보자니 왕복 백 미터나 될 거리가 지친 몸에 너무 부담스럽다. 더구나 힘들게 들어갔다가 만일 식사가 되지 않는다면 헛걸음에 대한 후회는 또 오죽할까. 평화의 댐에 식당이 없다는 것만 미리 알았어도 먹는 문제는 어떻게든 대비를 했을 텐데…. 배낭에 과자부스러기라도 좀 넣어 올 걸.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생각들이 들쑥날쑥 번잡하게 떠올랐다. 그 옛날 햄릿의 갈등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때 휴게소로부터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빠져나와 터널로 진입해 사라져 갔다. 아차! 식사가 되는지 물어보기나 할 걸…. 승용차 꽁무니를 바라보며 또 때늦은 후회를 했다. 노곤한 상태로 앉아 있자니 차를 세울 힘이 없었고, 실은 그보다 지친 머리의 순발력이 따라주지 않은 게 먼저였다. 그런데 승용차의 주인은 식사 손님일까. 아니면 퇴근하는 휴게소 사장이나 직원일까? 아니, 내가 왜 이러나. 이미 지나 가버린 사람인데 그가 사장이든 손님이든 무슨 상관이라는 건가? 생각은 앞뒤 분간도 없이 뒤섞였다.

얼핏 반전하여 그 운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어스름 녘에 이 높은 고갯마루 터널 앞에 홀로 앉아 있는 내가 예사로 보이지는 않겠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체로 북쪽과 관계된 어떤 불순한 신분을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나마 작고 아담한 체격에다 크게 악해 보이지 않는 인상 덕을 본 건지는 알수 없지만….

가야지! 평화의 댐에서 밀려진 시간 탓으로 내심 다급해서 5분간 이런저런 갈등과 부질없는 생각만 하다가 힘겹게 일어나서 괴물의 아가리처럼 열린 터널로 들어섰다. 차량이라곤 검은색 승용차가 마지막으로 터널 안은 세상이 멎은 듯 고요했다.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반대쪽 입구에 소형차 한 대만 진입해도 심장이 울릴 만큼 굉음이 심하다는 건 며칠간의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 차량 통행이 없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해산터널은 1,986미터로 비교적 긴 터널이다. 터널 안은 그나마 붉게 등이 켜져 있고, 일직선 터널이지만 낮이라면 작은 빛점으로라도 보일 터널 끝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해안 펀치볼에서 동면 방향으로 나온 돌산령 터널은 2,995미터로 해산터널보다 1킬로미터가량 더 길지만 밝은 오전이어서 바늘구멍만한 끝이 보였었다. 하지만 빈번한 차량 진입으로 소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돌산령 터널과 해산터널은 국토횡단으로 통과한 터널 중 가장 긴 터널들이다. 최근 개통된 서울양양간고속도로의 인제터널은 무려 11킬로미터나 된다지만 일반도로에서는 해산터널도 흔치 않은 길이다. 흔히들 '아무 데 가서 힘 자랑하지 마라.' 또는 '…양반 자랑하지 마라.' 따위의 속담이 있듯 이쯤 되면 '강원도에 가서 터널 자랑하지 마라'라는 속담이 나올 법도 하다.

터널에 진입하여 오른쪽 보행로를 따라 걸었다. 그것도 몸에 밴 일종의 타성이었다. 잠시 후 차량 통행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나 하며 도로 가운데로 내려섰다.

어두운 밤. 세상 모든 것과 단절된 채 정확히 좌우로 균제된 터널 가운데로 걷자니 심상으로서의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절대 정적 속에 평소에는 거의 생각지도 않던, 좀 어려운 말로 '실존'이라는 것이 떠 올랐다. 원시인류의 생활상이나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현재로서는 별 의미도 없는 생각들. 또는 가족이나 나를 둘러싼 존재들과의 관계나 인연 따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터널'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출장길에 승용차로 터널을 지나던 주인공 남자가 터널 중간쯤에서 앞과 뒤가 연이어 무너져 내려 암흑 속에 갇히면서 겪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의 현재보다는 훨씬 더 처절했겠지만 영화의 주인공도 그 상황에서 나와 조금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해산터널이 환영처럼 오버 랩 되었다. 만약 그 영화를 국토횡단 이전에 보았다면 터널 통과에 얼마간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았을까.

30분 남짓 걸려 마침내 긴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밤에 통과한 1,986미터 터널은 실제보다 더 긴 듯 느껴졌다. 어두운 밤이라도 주변이 흐리게나마 보이는 바깥과는 느껴지는 심리적 상태가 다른 것 같았다. 지금껏 4일간 걸어 온 모든 구간 중에서 해산터널 통과는 단연 압권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예단할 수는 없겠지만 국토횡단을 마무리한 후 돌이켜 보아도 역시 해산터널은 아마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구름 사이로 떠가는 반달은 터널 전보다 조금은 더 선명해 보였다. 어려운 과정이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지친 몸으로도 기분은 나름 상쾌했다. 그러나 터널 통과 중 긴장감으로 잊고 있던 시장기가 다시 견디기 어려운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참고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지도상으로는 고갯길 주위에 어떤 인위적인 시설도 없는데 오른쪽으로 아득히 먼 곳에서 가물가물한 불빛 두어 점이 보였다. 민가일 가능성보다 군부대 야전 막사쯤으로 짐작되는데 어떻든 해산령 쉼터 이후 유일하게 보이는 인간의 흔적이었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은 터널 전보다 굴곡이 더 심한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휘어 휘어 내리며 또 하나의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느닷없이 '휘익~' '휘익~' 하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귓바퀴에 부딪힐 듯 스치며 바람을 일으키는 새의 날개짓이었다. '푸득' '푸드득' 하는 소리가 두어 번 반복되고 한 마리가 '끼악 끼악' 하더니 여러 마리가 동시에 불쾌한 소리로 왁자지껄 울어댔다. 이어서 검은 새들 무리가 머리 위 허공으로 '휘익 휘익' 집단 비행을 했다. 그래도 야생의 새들조차 어떤 선을 지키려는 걸까? 실제 상해를 일으킬 정도의 공격은 가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새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물론 어둠 속에 난데없이 나타난 나를 자기들의 평화를 헤치는 적으로 보았기 때문이겠다.

검은 새 떼의 출현은 문득 학창 시절 보았던 알프레드 히치콕의 명작 '새'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너무 오래되어 스토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불길한 느낌의 초현실주의적인 영화였다. 불쾌한 소리로 울부짖는 수많은 무리의 새 떼가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공격하거나 어느 집 방안으로 몰려들고, 새들의 공격으로 양쪽 안구가 파인 남자 따위의 끔찍한 장면들이 어슴푸레 떠오르는 정도다. 영화를 떠올리며 드는 생각은 현재의 연출 기술과는 아주 거리가 먼 시대인데 어떻게 학교로 집 안으로 수많은 새 떼를 몰아갈 수 있었는지. 한가한 시간이라 별것들이 다 궁금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듯 지금까지는 어둠 속에서도 지체된 시간에의 조바심과 피로와 갈증, 배고픔 같은 원초적인 문제가 생각을 지배했었다. 그런데 느닷없는 검은 새 떼의 출현으로 내가 홀로 낯선 해산령 밤길을 걷고 있다는 상황이 현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인적 없이 고요한 밤의 해산령. 홀로 걷는 적막강산에 투덕거리는 내 발자국 소리 만이 적조를 깨트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해산터널에서처럼 인적이 없다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이 밤중에 만약 어떤 차량이 지난다면? 그건 적지 않게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밤중에 고갯길을 걷고 있는 나를 본 그 운전자도 무척 놀랄 것이다. 홀로 밤길을 걷는 사정을 묻거나 동승을 권하기 보다는 경계를 하며 급히 달려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겠다. 그가 만약 선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몸을 털리는 정도가 아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해산령이 접경지역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으므로,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처럼 무장공비를 상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또는 숲속에서 느닷없이 어떤 산짐승이 뛰쳐나온다면?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정말 두려운 건 검은 새 떼나 산짐승 따위가 아니라 역시 선악 불문하고 동종인 인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걱정이 엄습했다. 내가 이 밤중에 해산령을 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가족에게도 괜한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고 구체적인 행로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고라도 난다면? 생각해 보니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어 가까운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간단히 내 사정을 들은 그는 깜짝 놀라, 바쁜 입시미술학원 수업 중임에도 컴퓨터의 인터넷 지도를 열고 현재 내가 걷고 있는 대략적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고선 112 신고를 권하다가 아니면 자기가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신고를 하면 경찰에서 차를 보내올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앞으로 한 시간가량이면 풍산리에 도착할 것 같아 그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밤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조였던 것 같다. 후배로부터 두어 차례 확인 전화를 위안 삼아 발걸음을 이어갔다.

좌로 우로 끝없이 굽이진 밤길을 걸으며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후회스런 일들을 곱씹었다. 만약 모든 것이 순조로워서 애초의 예정대로 아침에 방산면 소재지에서 출발했다면? 아니면 평화의 댐에서 너무 꾸물거리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등에 황혼빛을 받으며 해산령 내리막길을 여유롭게 걸었을 텐데….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은 건 뻔히 알면서도 어둠 속 걸음걸음에 시시각각 되살아나는 아쉬움은 쉽게 제어되지 않았다.

그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해산령 밤길을 사진 한 컷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 오르막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전원을 켜다가 말고 '아차!' 하며 카메라를 배낭에 되 집어넣었다. 야간 촬영에 터트릴 수밖에 없는 플래시 빛에 경찰이 출동하는 등 어떤 돌발 상황이 초래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막연한 불안감과 지체된 시간에의 조바심으로 걷는 밤길에도 슬며시 떠오르는 상념들. 조각구름 사이로 고갯길을 비춰주는 맑은 달빛은 피로에 지친 나그네에게 오랜 옛 시절의 감상을 소환했다. 굽이굽이 끝없이 이어지는 해산령 고갯길은 어릴 적 누님 또래들이 많이도 부르던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떠올려 주었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애절한 곡조가 어릴 적 듣던 유성기 소리처럼 머릿속에 맴돌면서 나도 모르게 콧소리로 되풀이 되풀이해 흥얼거렸다. 아직 전쟁의 상흔이 잔설처럼 남아있던 시절이라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일상으로 들렸고 그 가사와 음률은 철없던 귀에도 무척이나 처연했다.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무심히 곡조를 흥얼거리는 중 해산령 밤길은 순간 화약 연기 자욱한 미아리고개로 페이드인 되어,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미아리고개로 끌려가시는 아버님의 모습이 환영처럼 체현되었다.

그 시절, 너무 어려서 뵌 기억조차 없는 아버님은 1950년 발발한 남북 전쟁 중 우리 가족에게서 종적이 사라지셨다. 오랜 세월 후 어느 해부터는 제사도 모시던 중 2006년 '남북 이산가족 생사 확인' 사업으로 북에 계시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어떤 연유로 민들레 홀씨처럼 그 모진 땅으로 가셨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강제적인 힘에 떠밀려 가신 건 분명한 듯하다. 화상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간절한 천재일우의 기회는 애석하게도 그 후 재발한 남북 간 갈등으로 취소되고 말았다.

아버님은 6.25 발발 당시 서울에서 용산국민학교 교사로서 야간대학에도 다니시던 중이었다. 당시 중앙여중 재학 중으로 함께 자취하시던 고모님은 서울 하늘에 붉은 깃발이 날리던 어느 날 아침, 아버님께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지금 못 가이 니 먼저 내려가그라."

라고 말씀하시고 나가셨다는데 그것이 아버님과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고모님께선 중앙선 철길 단절로, 안정면이 고향인 옥천 댁 친정 식구들에 의지해 풍찬노숙하며 죽령을 넘어 고향 영주에 당도하셨단다. 그리고 조부모님께서는 긴긴 세월 외 아드님 잃으신 한을 풀지 못하신 채 오래전 먼 길 떠나셨다.

질곡의 세월. 허깨비 같은 이데올로기의 굴레에 포박되어 끌려가셨을 아버님인들 사랑하는 부모 처자, 그리운 고향 산천을 촌각인들 잊으셨을까. 틀어진 운명으로 못하신 효도는 평생 오죽이나 한탄하셨을까?

불현듯 고방산 숙소에서 만났던 강 씨의 목소리가 환청인 듯 들렸다.

"나이를 먹으니까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서…. 허허!"

이렇듯 북에서 살아야 할 사람은 오매불망 북쪽의 어머니를 그리며 남쪽에서 살고, 남쪽에서 사셔야 할 아버님은 그 모진 땅에서 평생 망향의 한을 삭이며 사셨을 터이니 이 무슨 기괴한 운명이란 말인가?

어두운 해산령. 스산한 바람에 스치는 늦가을 이운 풀잎 소리는, 혼인 십 년에 아버님과 생이별하신 어머님의 한숨 소리인 듯 비감스러웠다. 시부모님 앞이라 내색도 못하시고 숨어 눈물 훔치며 한 생 살아오신 어머님은 만년에야 아버님 소식을 들으셨다.

"인제 와서 보먼 머하노?"

멀리서 전화로 드린 상봉 소식에 대한 어머님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어머님은 아버님이 미아리고개를 넘으셨을지도 모를 무더운 여름. 내가 이 해산령을 넘기 한 해 전 7월 어느 날, 한 많은 세월을 잊으셨다. 이런 내력들이 나로 하여금 '휴전선 따라 걷기 국토횡단'에 나서게끔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기나긴 해산령 밤길에 온몸의 힘이 소진될 즈음, 멀리 고개 아래로 명멸하듯 반짝이는 불빛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가시거리로 다가오는 풍산리. 바닥 난 허벅지와 종아리의 힘을 애써 버티며 부지런히 걸어 내려 마침내 작은 교량에 발을 들여놓았다. 돌다리의 머리에는 '풍산교'라는 명패가 붙어있었다. 다리를 건너 어두운 난간 끄트머리에 무너지듯 지친 몸을 내려뜨렸다. 그리고 심호흡과 함께 열어 본 폴더 폰 화면에는 거의 정확히 여덟 시로 표시되어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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