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는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된 신라사 연구중 비교적 소홀하게 취급됐던 신라의 대외관계사를 집중 조명하는학술대회를 17-18일 이틀동안 경주온천관광호텔에서 열었다.93신라문화제의 일환으로 열린 이 학술대회는 전국의 신라사 전공자들이 모여 대백제.고구려관계를 포함하여 대중.왜.발해.서역관계까지 광범위하게 다룸으로써 삼국중 가장 열세에 처했던 신라가 어떤 대외접촉을 통하여 삼국을통일하고, 통일이후 재편되는 국제질서에서 어떻게 견제와 균형을 유지했는지를 구명하는 계기가 됐다.영남대 이형우교수는 {탈해집단의 사로지역 이주}라는 논문에서 혁거세의등장으로 형성된 사로국은 보다 우수한 문화를 바탕으로 한 탈해집단이 동해안에 이주한 뒤 형산강의 지류를 따라 경주로 들어와 박씨계와 연합하여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자연히 탈해집단과 연관된 지역을 확보, 이 지역에 새로운 통치방법을 강구했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탈해계의 이주경로중 탈해가 처음 정착하였던 {아진포}를 영일지역(이병도)이나 감포지역(천관우)으로 보지 않고 감포의 남쪽 경주군 양남면 하서리로 비정했다.
충북대 량기석교수는 5-6세기 전반 신라와 백제 관계를 단순히 나제동맹의시각에서 일률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6세기초 지증왕은 친백제 노선에서 친고구려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려제 대결구도에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대내적 체제정비에 전념했다. 법흥왕은 백제와 수교, 친백제로선회했고 진흥왕은 친백제노선을 유지하면서 백제와 공동으로 고구려에 대응하여 북진(서기 551년)이라는 값진 성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돌연 신라가 친고구려 노선으로 전환, 백제의 한강유역을 탈취하면서 나제양국은 관산성 전투를 치렀다. 이때부터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권을 행사하였고, 가야지역을 장악하여 삼국항쟁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서라벌군사연구소 이종학소장은 광개토대왕비문에 있는 왜가 대화정권이라는해석을 부정했다. 4세기 말 일본열도의 왜는 한반도 출병이 불가능했으며,비문상 왜는 가야군이 주축이고 소수의 대마도왜가 편성된 것이라고 추정했다.경성대 한규철교수는 228년간 지속됐던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는 교섭보다 대립의 시기가 더 오래 지속됐다고 밝혔다. 교섭은 발해의 건국과 멸망,신라의 귀족항쟁등 양국이 정치 외교적으로 매우 불안했던 때, 대립은 발해왕권확립기등 양국 내정이 안정 내지 전성기를 구가했을 때 전개됐다. 양국교섭시 신라는 특정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발해는 고구려 멸망에 대한 대립 감정으로 안정이 아닌 위기하에서 신라와 교섭을 시도하는 한계를 각각 지녔다. 무하마드 깐수단국대교환교수는 슐라이만의 견문기 {중국과 인도소식}(851년)에는 아랍인들이 신라를 많은 섬을 거느린 나라(다도국)로 묘사했고,일부는 신라가 빛깔이 너무 검푸르러서 지프트해(력청해)라고 불리는 바다에에워싸인채 6개의 큰 섬을 거느리는 것으로 기술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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