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드라 '민족자부심'정책 고수여부 관심

미국의 위신과 아이티의 자존심이 맞부닥쳤다. 라틴 아메리카 35개국중 미국말을 안듣는 나라 둘이 있다. 쿠바와 아이티다.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아이티가 미국 눈밖에 난것은 이 나라 역사상 2백년만에 처음 실시된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대통령(41)을 취임 반년만에 군부가몰아냈기 때문이다.유권자의 압도적 지지로 뽑힌 가톨릭신부출신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추방한사람은 아리스티드가 임명한 군사령관 라울 세드라(40)중장이었다.인권탄압중지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민정복귀를 강력히 요구한 미국은 세드라와 그의 추종자들의 해외망명을 권유했지만 세드라는 들은척도 않았다.특히 세드라는 작년 여름 아리스티드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한 미국과이 신사협정을 어김으로써 이를 주선한 클린턴대통령 얼굴에 침을 뱉은 꼴이 됐다.최근에는 아이티내 국제인권단체 요원들을 모두 추방하고 아리스티드 측근가톨릭신부를 암살하여 사태가 더욱 악화됐다.

그는 스스로 샤르밀 퍼롤트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퍼롤트는 1918년 미군 통치하에서 농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미해병대와 싸우다 죽은 의병대장이다. '먼로 독트린'을 선포하고 영토확장에 발벗고 나선 미국이 1915년 해병 1개여단을 아이티에 상륙시켰다. 미군은 계엄을 선포하고 괴뢰정권을 수립한뒤 '아이티를 미국속령으로 한다'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아이티출신허수아비 대통령이 있을뿐 미군이 정부요직을 다 차지했다.전국적으로 4만명이 봉기했다. 게릴라전을 이끈 지도자 퍼롤트는 전투에서장렬하게 죽었지만 반미운동의 불길이 꺼진것은 아니었다.

10년뒤에 일어난 2차 민중봉기는 약 2백명의 농대생들이 수도 한복판에서 퍼롤트의 사진을 들고 '양키 고홈'데모를 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시위대는 금방 2만명으로 늘어났다. 미군은 기관총을 쏴 진압에 나섰다. 희생자가 많이생겨 근로자들이 동조 총파업에 돌입했다. 나라가 온통 반미감정으로 들끓었다. 후버 미국대통령이 진상조사단을 파견했고 조사단은 미군의 강압정치를중지하고 해병대를 철수할 것을 건의했다.

이렇게 해서 부랴부랴 미군철수가 단행되어 지루한 군정도 19년만에 끝장났다. 1804년 독립이래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랜 주권국가라는 민족적 자부심에 가득찬 아이티인은 이때부터 어떤 외세라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갖게 됐다. 세드라는 제2의 퍼롤트가 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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