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가을, 낭만을 위하여

건망증이 있는 어느 고등학교 국어선생님께서 수업을 하러 3층 교실까지 다 올라와서 보니 교과서 갖고 오는 걸 깜박했다. 다시 아래층 교무실까지 3층계단을 오르내리기도 뭣해서 맨앞줄에 앉은 학생의 책을 빌려들고 대신 학생은 옆자리 짝궁 책을 같이 보도록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잠시후 애들말로 엽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수업을 하다보니 앞에 앉은 녀석이 책도 안갖고 앉아있는 게 눈에 띈 것이다. 조금전 학생책을 빌린 걸 깜박한 선생님이 녀석의 이마에 왕꿀밤을 먹이며 고함을 쳤다.

"야 임마, 수업시간에 책도 안갖고 오는 녀석이 어딨어!"지어낸 개그가 아닌 교육감님이 보증한 실화다. 최근들어 '디지털 치매'라는 신조어가 생길만큼 건망증과 치매에 대한 관심과 불안이 부쩍 커지고 있다.

건망증과 치매의 정신의학적 구분은 중년주부가 휴대폰을 냉장고에 넣고 잊어버리는 단계는 건망증, 냉장고에 들어있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이걸로 뭘 해먹지?' 하면 기억장애, 냄비에 휴대폰을 넣고 끓이기 시작하면 중증치매 단계로 본다는데….암에 못지않게 치매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고 있는것은 치매발생의 원인인 성인병이 늘어나는데다 치매질환에 의한 사망공포보다 가족생활의 파괴라는 정신적 부담과 불안이 더 큰 탓이다.

그러나 건망증이든 치매든 심각한 중증질환 상태가 아니라면 어느정도의 건망증은 생활이 복잡하고 힘들수록 조금은 필요한 삶의 여유로 인식하며 살 필요가 있다. 산수화의 여백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어떤것을 기억하고 어떤것을 잊어버리느냐에 따라 유익한 건망증이 될수도 있고 불행한 치매가 될수도 있다. 복잡한 세상 조금은 잊고 살되 소중한 것만 기억하며 산다면 건망증도 나쁜것만은 아니다. 팔공산 마로니에 낙엽길을 지날때 '10월의 마지막 밤'이나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한곡쯤 흥얼거릴 수 있다면 비록 냉장고에 휴대폰을 넣고 나왔더라도 아직은 낭만을 잊지 않은 가을여인이랄 수 있다.

똑소리나게 휴대폰 챙기고 증권시세 외우며 다닌다해도 코스모스 들녘길 추억하나 떠올릴수 없는 '낭만 치매환자'에겐 가을은 한낱 캘린더 속에서 메마르게 지나가 버리는 계절일 뿐이다.

오늘의 세상살이를 돌아보면 이처럼 적당히 잊는게 좋을 것들은 시시콜콜 곱씹으며 따지고 살고, 정작 잊어서 안될 일들은 쉬 잊어버리며 살아가는 것 같다.

삶의 맛, 신의, 공동체의 도덕적 규범 같은것엔 치매수준으로 모른체 망각하며 살면서 권력과 물질 추구에는 한치의 여백도 없이 챙기며 사는 모습들에서 긍정적인 건망증의 멋과 여유가 아쉽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디지털 치매'를 걱정하지만 컨츄리꼬꼬 노래가사 2절쯤 다 못외우고 깜박한들 삶이 각박해질 것까지 없다. 나에 대한 친구의 사소한 실수나 이웃의 잘못같은 건 망각해 주는것이 좋은 건망증이요 넉넉한 삶의 여백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가치를 멀쩡한 정신을 갖고도 치매환자처럼 팽개쳐 망각하는 세태는 분명 이 사회의 병폐다.

정신과의 치매진단에는 30개 항목의 치매체크리스트가 있다. 그 기준을 놓고 대선 정국을 들여다보면 제 정신 멀쩡한 치매환자들이 도처에 득실댄다. 탈당과 입당을 밥먹듯해대는 철새 정치꾼들은 제 스스로 언제 어느당을 오락가락했는지 깜박 할 정도로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치매증세를 보인다.

(체크 8항: 어떤일을 해놓고 잊고 또 반복한다) 어제 했던 거짓말을 국민들도 미쳐 잊어버리기 전에 제 먼저 말을 바꾸는 증세 또한 심각한 치매증이다. (체크 4항:얼마전에 했거나 들은 얘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실천 못할 대선공약을 남발하고도 5년뒤 똑같은 공약을 다시 내거는 공허한 짓도 정신의학적으로 구분하면 뇌세포 질환에 의한것이 아닌 의식이 병든데서 나온 치매다.

(체크 3항:교묘한 공작과 정쟁을 꾸며내고 정치이권 챙기는 솜씨들을 보면 분명 정신은 여간 멀쩡한게 아닌데 지도자가 잊어서는 안될 덕목과 가치를 지키는데는 완벽한 치매환자가 돼 버린다).

과연 두달후에 선택해야할 대선후보는 어느정도의 건망증의 여유를 지니고 얼마만큼 소중한 가치를 잊지않는 사람이어야 할까. 적어도 이 가을 덕수궁 뜨락의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릴케의 시(詩) '가을날'을 읊는정도의 낭만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떨까. '주님, 어느덧 가을입니다/ 지나간 여름은 위대 하였습니다/ 일년의 마지막 과실이 열리도록 따뜻한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베풀어 주십시오/ 밤중에 눈을 뜨고 책을 읽으며/ 긴 편지를 쓸것입니다'.

그렇다. 대선주자쯤이면 독서를 해야겠지 미국 케니스 웨스턴 의과대학 치매연구팀은 독서를 안하면 치매 발병률이 3배나 높더라고 했는데 책과 담쌓고 정치판에서 막 굴러먹기만한 '정(政)돌뱅이'여서는 여유있는 건망증 대신 치매환자 행세만 할게 뻔하니까.이 가을, 정치인 국민 모두 독서를 해보자. 릴케의 시처럼 누군가에게 편지도 한번 써보자. 치매예방과 여유있는 건망증, 그리고 가을의 낭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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