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제언-2·8 독립 선언정신을 다시 승화시키자

8일은 일본 동경에서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을 선포한지 84년이 되지만 3·1독립만세운동의 그늘에 가려 역사적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 제1차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와 세계언론들의 약소민족들의 독립 및 발언권 요구보도 등 세계피압박 민족의 동향, 광무황제의 폭붕(暴崩)이 도화선이 되어 이 선언을 선포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유학하던 젊은이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여 최팔용, 이광수, 김철수 등 실행위원으로 선출된 10명이 주동이 되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하고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고 세계각국의 언론사와 대사관, 일본정부의 대신들에게 그들의 뜻이 게재되도록 전하기에 이르렀다.

1919년 2월 8일 적지인 동경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총회 개최라는 명목으로 유학생 600여명이 모여들자 회장 백남규가 개최를 선언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 불리는 이 선언에 나타난 정신은 일본과 영·미 등 세계열강들에게 한국이 일본국의 보호국이 아니라 자주독립국임과 한민족의 민족자결·진취적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며, 민족의 주체성, 일본이 불응할 경우 영원히 혈전을 전개한다는 극한항쟁의 정신, 국제평화와 정의 등 우리 민족의 실천적 행동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상대국의 수도인 동경 한복판에서 우국충정에 불타는 젊은 유학생과 청년들에 의해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세계만방에 발포한 참신하고 젊은 지식인들의 항쟁이었으며, 총이나 칼 한자루 없이 맨주먹으로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후 국내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나게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고, 을사늑결과 군대해산 의병활동 전개이후 침체되어 있던 국·내외 독립운동의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2·8독립선언의 의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비록 84년이라는 오래된 역사속의 일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다시한번 그날의 거룩하고 높은 정신을 되새기는 소중한 날로 기억되길 바란다. 강춘덕(안동보훈지청 보훈과)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