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韓勝源) 약력
▲1939년 전남 장흥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목선(木船)' 당선
▲소설집
'앞산도 첩첩하고' '안개바다' '미망하는 새' '폐촌' '포구의 달' '내 고향 남쪽바다' '새터말 사람들' '해변의 길손'등
▲장편집
'불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 ' '해일 ' '동학제' '아버지를 위하여' '까마' '시인의 잠' '우리들의 돌탑' '연꽃바다' '해산 가는 길''꿈''사랑''멍텅구리배''물보라' 등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수상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
지난 해에 남해안을 정처없이 떠돌다가 희한한 일을 당했다.
깊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 섬에 이르렀다.
지도상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이름없는 조그마한 섬이었다.
작은 도시에서 교직에 있다가 명예퇴직을 한 다음 하루 쉬고 하루 노는 삶을 살아오던 나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짜증만 났다.
자식들에게 주고 남은 퇴직금을 모두 털어 산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아내는 나를 버리고 자식들에게로 가버렸다.
나는 증권회사 근처를 배회하면서 깡소주만 마셨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날마다 마신 술 때문에 내 육체와 영혼은 황폐해졌다.
농사를 지으려고 막기는 했지만 강물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한 간척지처럼 갈대들만 무성해졌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하고 정처없이 나섰다가 그 이름없는 섬까지 흘러든 것이었다.
섬 전체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들로 가득차 있었고 그 숲은 울창했다.
사람 사는 집은 그 숲 어귀에 오직 한 채가 있을 뿐이었다.
섬의 남쪽 연안 모래 언덕에는 빨간 찔레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 아래로는 눈부시게 하얀 백사장이 있었다.
이때껏 많은 바닷가를 다녀보았지만 그 백사장처럼 길고 흰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또한 물은 쪽빛이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맑은지 한 삼미터쯤의 깊이에 있는 수초나 바둑알 같은 조약돌들이 손에 집힐 듯 들여다 보였다.
그 맑은 물 앞에 서자 내 마음도 그렇게 맑아지고 투명해지는 듯싶었다.
한 앳된 처녀가 투명한 물 속에 두 발을 디디고 ㄱ자로 허리를 굽힌 채 무엇인가를 빨고 있었다.
초가을 한낮이었고, 처녀의 흑갈색 말갈기같은 생머리 위로는 금실과 은실이 섞인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외꺼풀인 처녀의 눈매는 약간 부은 듯싶었지만 눈동자는 새까맸고, 콧날은 오똑했고, 입술은 바야흐로 깎아놓은 곶감색깔이었다.
목은 가늘고 길었고, 긴 머리털들은 그 목 양쪽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바다 수면에는 고기들이 솟아올라서 파닥거리는 것처럼 해의 조각들이 꿈틀거렸다.
꿈틀거리던 해의 조각들은 찬란한 허공으로 튕겨 날아갔다.
먼 바다에서 달려온 파도들은 흰 모래톱에서 재주를 넘었다.
재주를 넘으면서 우윳빛 거품을 토했다.
일렁거리는 물결을 따라 물 속의 바둑알 같은 희고 검은 조약돌들이 춤을 추었다.
처녀는 허벅다리까지 드러난 하얀색의 짧은 치마를 입은 채 하얀 짧은 소매의 셔츠만을 입고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손수건이나 책보나 스카프처럼 네모난 어떤 것을 조심스럽게 빨듯이 한데 뭉쳐서 주물럭주물럭하다가 그것을 활짝 펼쳐 들고 이쪽저쪽을 살펴보았다.
그것의 뒤쪽을 오랜동안 살피고 있기도 했다.
아직 얼룩이나 떼가 덜 빠지지 않았는가 하고 살피는 것이었다.
대관절 무엇을 그렇게 빨고 있을까. 나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 처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발소리를 죽이면서 다가갔다.
두 걸음쯤 가까이 다가간 내 그림자가 처녀의 손길 앞에 드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처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일만 계속했다.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처녀가 손에 들고 주물럭거리며 빠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물묻은 천이 너무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니, 처녀는 나를 속이기 위해 그냥 빈 손으로 무엇인가를 빠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처녀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홀리기 위해 처녀로 둔갑을 한 여우 아닐까. 나는 가슴 속과 머리 속에서 동시에 전율이 일어났고, 그것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내 살갗에는 소름이 돋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나는 짧은 흰 치마와 그 밑으로 드러난 늘씬한 다리와 오금과 종아리와 소매 짧은 서츠 차림인 처녀의 볼록한 젖가슴과 얼굴을 좀더 세세히 살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빠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에는 처녀의 태도나 표정이 너무 신중하고 엄숙했다.
지극히 신성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경건하고 숭엄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옆에 사람이 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그 일에 깊이 빠져 들어 있었다.
나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어
"처녀, 실례지만 지금 무엇을 빨고 있는 것이여? 내 눈에는 처녀가 빨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처녀의 경건함과 진지함과 숭엄함에 질려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한동안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만일 내가 그렇게 묻는다면 처녀가 숭엄하게 하고있는 일의 가락이 허트러질 것같았다.
그러면 처녀의 빨래가 망치게 될 듯싶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기다렸다.
처녀가 하는 일이 한 매듭 지어질 때까지. 이윽고 처녀는 이때껏 빤 것을 두 손끝으로 펼쳐 들고 눈부신 흰 모래밭으로 걸어나갔다.
거기에다 조심스럽게 펴서 널어 놓았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면서 조심스럽게 뒤따라가서 처녀가 펴 널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하고 내려다 보았다.
한데 불행하게도 그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서워졌다.
혹시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더욱 궁금해졌다.
처녀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리더니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분명하게 처녀에게서 날아오른 아릿한 몸냄새를 맡았다.
냄새라기보다는 향기였다.
가령 미역이나 다시마나 우뭇가사리에서 나는 듯한 향기였다.
나는 그 향 때문에 진저리를 쳤다.
처녀는 아까처럼 다시 투명한 무엇인가를 빨기 시작했다.
나는 궁금증을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두 발로 물을 디디면서 처녀 옆으로 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실례지만 지금 처녀가 빨아다가 흰 모래밭에다 널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처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고 일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영혼이요".
그 목소리는 오래 된 절의 처마에 걸려 있는 풍경이 스치는 바람결에 우는 소리처럼 향맑았다.
그 향맑은 소리가 내 영혼 시울을 바늘끝처럼 우비고 있었다.
나는 진저리를 쳤다.
그 목소리는 내 몸의 세포들 속으로 배어들고 있었다.
"뭐? 영혼을 빨고 있다고 말했어?"
하고 나는 반문했다.
처녀는
"네에". 하고 분명하게 대답을 하고나서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이것을 마음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반문했다.
"아니 영혼하고 마음을 어떻게 빨 수가 있다는 거야?"
처녀는 내 말에 대꾸하려 하지 않고 자기 일만 계속했다.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사람의 몸 속의 영혼과 마음을 어떻게 꺼내서 빨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을 과연 빨고 어쩌고 할 수 있기나 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이 처녀는 누구의 영혼과 마음을 어떻게 가져다가 빤다는 것인가. 나는 처녀의 하는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한동안 멍청히 서 있었다.
처녀가 내 마음을 읽은 듯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도시에 사는 제 친구들이 저에게 땟국으로 얼룩져 있는 영혼하고 마음하고를 소포로 보내주면 제가 이렇게 빨아서 청정해역의 가을 양광에다가 하얗게 바래서 보내주곤 해요. 선생님도 그게 더럽혀졌다 싶으면 이리 내놓고 저기 나무 그늘에 가서 한 잠 주무시고 나오십시오. 제가 깨끗하게 빨아서 이 찬란한 볕에다가 하얗게 바래놓을게요".
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처녀와 실랑이질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처녀가 가리키는 나무 그늘을 향해 갔다.
처녀에게 영혼을 빨아 하얗게 바래달라고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정처없이 떠도는 동안 지쳐 있었다.
"영혼을 어떻게 빨아서 하얗게 바랜단 말인가. 별 실없는 여자 다 보겠네".
나는 이렇게 투덜거리며 나무그늘로 가서 죽어 넘어지듯이 쓰러져 눈을 감아버렸다.
이렇게 눈을 감은 다음 영원히 뜨지 않게 되어버리기를 바라면서.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데 눈을 뜨자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처녀는 누군가의 영혼을 바닷물에 빨아 모래밭에 바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햇살은 전보다 더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고, 바다는 더 진한 쪽빛으로 변한 채 출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거짓말처럼 싱싱해져 있었다.
처녀가 나를 향해 말했다.
"어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치시면 언제든지 다시 오십시오".
아, 그렇다면 내가 잠들어있는 동안 처녀가 내 영혼을 빨아서 하얗게 바래주었다는 것 아닌가.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나하고 함께 그 섬으로 들어갑시다.
거기에 가서 더럽혀지고 땟국으로 얼룩진 영혼과 마음을 빨아 가을볕에 하얗게 바래가지고 나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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