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승합차 이름으로 더 유명했던 가봉의 봉고 대통령. KBS 1TV는 7일 역사스페셜(밤 10시)을 통해 한동안 한국 정부가 아프리카 변방의 봉고 대통령에서 국운을 걸 정도로 매달렸던 사연을 '발굴, 정부기록보존소'편을 통해 소개한다.
28년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국빈대우를 받으며 방한해 온 국민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봉고대통령. 그는 75년 이후에도 1984.1996년 두 차례나 더 한국을 방문하여 외국 국가원수로서 가장 많은 방한 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75년 방한 당시 정부는 그의 방한을 기념하는 기념우표, 기념담배를 제작했고 그의 국내 일정은 연일 일간지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정도로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국이 이토록 봉고대통령에게 매달린 사연은 가봉이 한국 외교의 교두보였기 때문. 당시 한국은 월남 독재정권 지지로 국제적 입지가 좁아졌으며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을 향한 북한의 적극적 외교는 괄목할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UN 내에서의 입지는 갈수록 불분명해졌다.
따라서 신생독립국 중 드물게 친서방정책을 펼쳤던 가봉은 한국이 국제 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징검다리였다.
여기에다 미국은 69년 7월 닉슨독트린을 발표해 아시아 방위 문제에서 대미의존도를 줄인다는 방침을 발표한다.
이 발표 이후 북한의 대미정책은 반미투쟁에서 미국과의 직접 접촉으로 변화한다.
심지어 미국내 친북세력을 키우고 주한미군철수와 한미관계 이간을 꾀하기에 이른다.
미국과의 접촉을 위해 북한이 선택한 접속채널 중 하나가 바로 가봉. 즉 한국의 가봉 외교는 북한에 대한 견제책이기도 했다.
'역사스페셜'은 가봉 현지에서 봉고 대통령을 만나 그의 육성 증언담을 듣고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봉고 대통령이 북한 방문시 미국에 전달해달라고 요청받은 김일성의 친서를 공개한다.
한편 당시 한국 정부는 23개국에 달하는 아프리카 수교국의 지지를 얻기위해 매년 10만달러가 넘는 돈을 무상지원했고, 북한은 75년 한해에만 무려 4천8백만달러라는 돈을 지출했다.
그러나 외교 무대를 둘러싼 남북 대결구도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채 상호 대립의 골을 깊게 만들 뿐이었다.
이러한 남북한 출혈적 외교대결은 1975년 제 30차 UN총회에서 남.북한 결의안이 모두 통과되면서 수그러들게 된다.
이재협기자 ljh2000@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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