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알려진 곳 숨은이야기] 영주 순흥

단종 悲運서린 '충절의 고향'

경북 영주시 순흥 땅은 한국 유교의 본향(本鄕)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과 조선조 단종 복위를 모의한 조선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의 일화가 남아 있는 곳이다.

국내 처음으로 주자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말의 문인 회헌(晦軒) 안향(安珦)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소수서원은 국내 최초 사립대학.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원단촌(지금의 내죽리와 청구리) 마을에 단종 복위에 얽힌 사연을 고스란히 전하는 제월교(霽月橋·속칭 청다리)와 압각수(鴨脚樹)가 있다.

◇순흥 청다리

소수서원 입구를 지나 부석사 방향으로 150m가량 올라가면 속칭 청다리란 다리를 만난다.

어릴 때 어머니와 이웃 동네 어른들의 이런 놀림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청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청다리의 원조는 죽계제월교(竹溪霽月橋)다.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 군사와 선비를 모으고 삼남(三南) 유림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다 발각돼 죽임을 당하면서 당시 동조했던 이 지역 수백 명의 선비들과 그 가족들이 희생되었다(정축지변·1457년). 그때 어렵사리 살아 남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데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실 제월교(속칭 청다리)는 단종 복위사건으로 암울하고 참담했던 역사가 끝나고 훗날 선비들이 '개성 송도는 선죽교, 영주 순흥에는 제월교'라고 했듯이 충절이 배어 있는 다리로 기억돼 오고 있다.

그러나 청다리는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과 마을 처녀가 정분이 나서 낳은 아이를 다리 밑에 버린 것에서 유래됐다는 잘못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박석홍(52) 영주시 학예연구원은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통치에 걸림돌이 된 유림들을 없애고자 유생들이 연애하여 낳은 자식들이라고 왜곡시켰다"며 "단종 복위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혁파될 때 군인들이 주민들을 살해하면서 살아남은 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생부모를 몰라 청(菁:여성의 다리)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은유법을 사용했다"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

지금은 그 청다리가 일반 다리와 별 차이 없는 시멘트 다리지만 당시엔 돌기둥에 나무 상판을 깔아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난 96년 죽계천 정비공사 도중 당시 교각과 좌대가 발굴돼 현재 소수박물관 노천전시장에 옮겨져 있다.

◇압각수(충신수)

금성단 서북 쪽에는 압각수(鴨脚樹)라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백 년 된 이 고목의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압각수는 정축지변 때 고사했다 순흥도호부가 다시 설치되자 되살아나는 등 순흥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이 나무는 주민들로부터 동신목(단종의 몸)으로 불린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제사를 올린다.

수령 약 1천100년, 높이 30m, 밑둥치 둘레 6m이나 뿌리 흔적으로 봐서 옛날에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분 고목이 되어 불타 없어졌거나 썩어 속이 비었지만 수백 년 묵은 가지들은 오랜 연륜을 느끼게 한다.

이 압각수는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 파란만장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며 순흥의 흥망 성쇄를 같이해온 역사적인 나무인 셈이다.

세조3년에 정축지변이 터지자 압각수는 말라 죽고 1629년에는 불에 타 일부분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의 전통문화' 등 영주향토지에는 "한 고승이 이곳을 지나면서 '흥주(순흥)가 폐하니, 이 은행나무가 죽고, 이 나무가 살면 순흥부가 다시 설치된다"는 말을 남겼는데 1643년 나무에 생기가 돌아 껍질이 생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기 시작해 순흥부가 다시 설치된 1682년 무성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금성대군은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돼, 순흥으로 유배당해 압각수에서 서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연금됐고 이듬해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안동에서 최후를 마쳤다.

그로 인해 순흥은 역모지라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됐고 순흥부는 없어지고 풍기군에 병합됐다.

그때 살해된 주민들의 피가 10여 리나 떨어진 안정면 동촌리 '피끝' 마을까지 흘렀다 해서 이 마을 이름이 '피끝'이라 불리고 있다.

영주·마경대기자 kdma@imaeil.com사진: 단종 복위사건으로 참담했던 역사가 끝나고 훗날 선비들이'개성 송도는 선죽교, 영주 순흥에는 제월교'라고 했듯이 충절이 배어 있는 다리로 기억돼 오고 있는 제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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