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영관의 인물탐방-주류도매업 장동일 사장

맨 주먹 자수성가… "노력이 중요"

주류도매업을 하는 장동일(張東一·65) 사장은 '술장사'로는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원로다.

10대 소년시절부터 지금껏 유흥업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 사람치고는 순수하고 소박하다.

돈 벌고 성공했답시고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술장사해서 성공이랄 수는 없다"며 되레 계면쩍어 한다.

열일곱살 나던 1957년 무작정 상경한 그에게 서울은 살기 쉬운 땅이 아니었다.

취직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고 험한 일을 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고향 선배와 '아이스께끼'통을 메고 다녔다.

열심히 뛰어 1등을 한 덕에 자전거를 얻기도 했다.

명동 시공관 앞에서 구두를 닦던 그를 눈여겨 본 이가 스탠드바 웨이터 자리를 소개했다.

손님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기분 좋게 놀다 간 손님은 다시 찾아줬다.

그렇게 8년을 일했다.

65년 그동안 모은 돈과 빚을 내 무교동에 스탠드바를 열었다.

처음으로 내장사를 시작했다

나라 살림살이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장사는 잘 됐다.

빌린 일숫돈을 갚고 돈이 남아 새로 주점을 열었다.

그러다 무교동의 호텔에 나이트클럽을 열었다.

힘깨나 쓴다는 높은 분들부터 돈 있다는 사람들이 고객이 됐다.

종업원들에겐 친절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그의 영업소에는 취직 못 한 고향 후배들이 하나 둘 찾아와 자리를 잡았다.

능력에 따라 경리와 관리를 맡겼다.

80년대 후반에는 나이트클럽협회 회장도 했다

90년대 들면서 주류도매업에 진출했다.

"자유당 시절부터 시작, 술장사치고는 나라안에서 제일 오래된 사람"이라는 그는 그러나 술장사로 큰 돈을 번 사람을 얼마 보지 못했다.

그 자신 꽤 벌었지만 사람 좋고 놀기 좋아하는 심성 때문에 적잖은 돈을 날리기도 했다.

딸만 넷을 뒀다.

네 딸이 나이가 들면서 혹여 자신의 직업이 딸 혼삿길을 막지나 않을까 걱정도 됐다.

위로 셋을 출가시켰고 사위는 모두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아내가 딸애들 교육을 잘 한 것 같다"고 한다.

고향 초등학교 후배인 부인은 대학졸업 후 서울서 은행에 다니며 그와 사귀고 결혼했다.

중졸 사위를 마땅찮아 하며 반대하던 장인 장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최고의 사위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그는 "많이 배우는 것보다는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구미 도개면 출신으로 형님과 조카가 아직 고향에 산다.

70년대 초반 모교인 도개 초등학교에 교문과 동상을 세워주면서 시작한 고향일은 지금껏 이어온다.

모교 장학금도 만들고 자신은 돈이 없어 수학여행도 못 가봤지만 후배들 수학여행 가는 일도 도운다.

모교 밴드부에 악기를 사주기도 하고, 고향 파출소에 순찰차를 기증하기도 했다.

그와 절친한 김종락(金鐘洛·67) 전 구미시의원은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주는 소박한 사람"이라며 "고향일이라면 마다않고 나선다"고 전해준다.

본격적으로 업을 시작한 때가 3공시절이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

그의 선견지명과 추진력이 나라 살림을 키워 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년 10월 26일에는 서울 사는 고향 사람들과 함께 구미 상모동 박 전 대통령의 생가를 찾는다.

논설위원 seo123@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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