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인 1946년 병술(丙戌)년은 기아, 병마, 시위, '폭동' 등으로 대구현대사에서 유난히 액화(厄禍)가 많은 해였다. 이해 여름 전국에 걸쳐 발생한 법정전염병인 콜레라(속칭 호열자)가 유독 대구에서 전국 최고의 사망률을 낸 것도 그 한 예였다. 발병자 대비 전국의 사망률이 51%였고, 경북도내의 사망률이 58%(4316명)였던 반면, 대구는 2578명의 발병자 중 무려 66% (1718명)의 사망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5월7일 중국에서 부산으로 귀국한 귀환동포들에 의해 번지기 시작한 콜레라는 5월 28일 경북 청도군에서 도내의 첫 환자를 발생시켰다. 6월12일 대구에서 4명의 사망자가 나오면서 콜레라공포증은 극도로 확산되었다. 수인성(水因性)전염병이었으므로 경북도 방역당국은 냉면, 빙수, 빙과, 노점음식 등의 매매금지, 음식점의 생차, 생어육제공금지 등의 도령(道令)을 긴급히 발령했다.
그러나 6월24일 100명을 넘어선 대구의 사망자 수가 28일에 250명, 7월3일엔 391명으로 급증했다. 발병자 중 사망비율도 대구가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대구의 식량난이 전국에서 가장 심했고, 이에 따른 영양실조로 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데다, 내륙도시 대구 특유의 가마솥더위로 찬 음료를 들이킬 기회가 많았던 까닭이다.
요즘 같으면 일과성 유행병으로 그칠 병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방역능력이 미흡했던 것 못지않게, 병마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인식부족이 큰 화근이었다. 아울러 콜레라에 대한 지나친 공포심이 문제였다. 환자가 발생하면 전염을 막기 위해 통행을 차단하고 격리 수용시켰는데, 가족들은 이 격리조치가 곧 '사망처리'의 한 과정으로 오인했다. 따라서 환자가 있어도 당국에 신고하기는커녕 쉬쉬 했고, 조사를 나오면 벽장에 숨기는 판국이었다. 이 때문에 병을 키웠고, 환자가족도 전염되기 일쑤였다. 또 감기몸살, 식중독 등 가벼운 병자나, 가난으로 끼니를 굶고 늘어진 사람조차 콜레라환자로 취급해 격리수용하는 바람에, 격분한 가족들은 환자를 신고하길 더욱 꺼리는 풍조였다. 이런 일 등으로 병마가 창궐한 막바지에는 트럭에 실려 오는 사체들로 화장터가 초만원을 이뤄, 공동묘지에 장작을 쌓고 그대로 화장해버리는 끔직한 일도 벌어졌다.
여름 한 철 장사인 냉 식음료 장사는 아예 결단이 났고, 가난뱅이들이 별 밑천 없이 벌어먹던 노점들도 펼 수 없게 되었다. 여름밤의 명물이던 중앙통의 야시(夜市)도 중지되었다. 사람이 들끓는 곳일수록 콜레라균이 번질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이 때문에 벌어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노점상들과 날품팔이들이 사정이 좀 덜한 다른 고장으로 떠나려 해도 여행허가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행허가증은 긴급한 생필품을 구입. 운반하려는 경우나, 가족의 사망, 출생, 질병 등으로 인한 불가피한 용무에 한해 발급되었다. 이것도 꼭 정(町.동)회장의 허가를 받은 후, 다시 콜레라 비 보균자라는 의사의 확인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먼 거리 여행자는 이 밖에도 콜레라 예방접종증명서와 검변증(檢便證)이 있어야만 했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이런 과정을 다 밟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대구방역당국의 하루 검변능력이 500명을 넘지 못한 반면 떠나려는 사람은 그 몇 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통차단은 물자수급난을 불러, 생필품 값을 폭등시켰다. 이래저래 살길이 막힌 대구의 바닥인생들은 "굶어 죽든, 병들어 죽든, 죽기는 매일반이다. 쌀 배급을 주던지, 아니면 어디 가서든 마음대로 벌어먹게 해다오!"하며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리고 병든 민초들로선 엎친 데 덮친, 지독히도 덥고 암울했던, 해방 이듬해 여름의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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