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와의 경기가 있던 날 아침, 대학 다니는 아들 녀석이 현관에 들어서면서 "졌다." 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곤 이불 속으로 쓰러져 버린다. 응원한답시고 밤새 쏘다닌 피곤함도 컸겠지만 당분간 축구로 즐길 일이 없게 된 허탈감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또 평소 스포츠에 무관심하던 아내도 어쩐 일인지 이번의 월드컵은 밤새워 TV를 보면서 제법 관전평까지 쏟아내더니 스위스전 후 아들과 똑같이 한숨을 내쉰다. 이는 비단 우리 집만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 별로 없는 세상에 오랜만의 즐거움이 너무 일찍 사라져 버렸고, 또 다시 4년이나 기다려야 하니 내쉴 수밖에 없는 한숨이었던 것이다.
의문이 드는 것은 주변에 거의 매일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건만 어떻게 해서 우리는 월드컵에만 목숨을 거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축구는 A매치밖에 없는가? 관심도 없고, 중계도 없고, 축구협회의 자구적인 노력도 미약하니 K리그는 출범 24년이 흘렀건만 경기장이 썰렁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이는 국제 경쟁력이 취약한 우리 축구의 기반을 보여주는 것이며, 국내축구로는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 못하는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축구계는 이제 무작정 '국내경기도 사랑해 주십사'하는 애원을 하기 전에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팔을 걷어야 한다. 그 중 가장 시급한 과제는 초·중학교 경기를 학교 간 대항에서 클럽대항으로 구조를 바꾸어야 하는 점이다. 원래 유소년 대상의 축구는 전문선수의 육성이 아닌 '즐기는 축구'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선수들의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위해서도 그렇고, 선수의 저변확대를 위해서도 그렇다. 이는 축구 종주대륙 유럽은 물론 미국, 일본, 그리고 축구 왕국 브라질에서도 이미 보편화된 방식이다. 우리만 초등학교부터 수업을 뒤로 한 채 합숙해가며 운동밖에 모르는 전문선수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 과제로서 고등학교와 대학의 경기는 학교 간 대항방식을 유지하되 대회 수를 줄이고, 예선경기를 다양화하여 지역대회를 활성화시키는 구조로 개편해야 한다. 경기는 주말과 방학을 이용하고, 대학경기는 홈앤드어웨이 방식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고교 축구팀이 수십 개에 불과한 실정에 비해 일본에는 수천 개 팀이 있음은 이러한 경기방식을 기본 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한때 대통령의 꿈이 있었고, 축구협회장으로서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되었으니 이제는 국내경기의 활성화에 전력해달라는 부탁이다. A매치 외에 국내경기의 운영과 관중 없는 프로리그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유럽 프로축구리그의 열광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K리그 팀들이 아직도 모기업의 홍보수단만을 강조하고 있음에 비해 10년이나 늦게 출범한 일본의 J리그는 '축구 100년 구상'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역연고 중심의 홈타운 제도를 시행하여 선진국형 클럽문화를 정착시키고 있다. 축구계의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는 몇 사람의 아이디어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비전문가까지 포함하는 중의를 모아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
텅 빈 경기장에 길들여진 선수가 세계의 조명을 받는 월드컵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국민에게 4년씩 기다리게 하지 않고 매일 축구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의 구축도 아직은 선진화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한 점에서 축구계는 내부적인 구조개혁과 함께 전광판으로 월드컵경기를 즐긴 축구마니아들, 그리고 TV 앞에서 밤새운 국민들을 국내 축구경기장으로 유인할 궁리를 서둘러 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이 성사되면 16강 탈락 후 우리 집에서 새어나오던 한숨 소리도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김동규 영남대 체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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