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여행] 감꽃

다른 꽃들 다 피고 5월 늦을 무렵에 피는 감꽃은 우리들에게 색다른 놀이와 달콤쌉쌀한 맛을 가져다 주었다. 자두꽃, 살구꽃, 사과꽃, 배꽃, 복숭아꽃 다 피는 듯 지고 문둥이가 산다는 문골 깊은 산 속에 참꽃까지 피었다가 지면 그제서야 게으른 감나무는 잎눈을 조금씩 부풀릴 대로 부풀리다가 꽃을 피운다. 동네 집집마다 하나쯤 담벼락과 이웃해 있던 감나무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새벽 물안개가 뿌연 시야로 동네 한 바퀴를 휘감을 때, 채 눈도 비비지 않은 아이들이 검정고무신을 끌며 동네 어귀로 뛰쳐나온다. 동네 어귀엔 제법 굵은 감나무 몇 그루가 동네를 지키고 있다. 그 땐 왜 그랬을까? 친구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볏짚에 높이 꿰어진 감꽃목걸이를 자랑하고 싶어 늦잠도 자지 않았다. 막내 여동생은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늦잠자다 누가 먼저 감꽃을 다 주워가면 어쩌나!" 이런저런 걱정으로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경쟁하듯이 감꽃을 주어 가져온 실에다 주렁주렁 매달아 목에다 걸고 처마 밑에다가 걸어놓기도 했다. 감꽃으로 목걸이를 하다가 주워 먹기도 하고 조금 더 큰 감은 장독에다 소금물로 삭혀 먹었다. 감꽃 맛은 처음에는 떨떠름하지만 곱씹으면 단맛이 배어나온다.

감잎이 터지면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헤집고 다녔다. 찔레순도 따먹고 아카시 꽃, 버찌, 오디, 앵두도 다 훑어 먹었다. 세상은 온통 먹을 것으로 그득그득해진다. 입이 새까매지도록 먹고 먹어도 배는 채워질 줄 몰랐다.

늦은 봄비와 함께 저녁연기가 온 동네로 퍼질 때면, 봄 내내 감나무 겨드랑이 밑에서 숨을 고르던 연노랑 감꽃이 산골 호롱불처럼 후드득후드득 터졌다. 꺼끌꺼끌한 보리타작이 끝나고, 보리이삭 줍기마저 대충 끝날 때쯤 내리는 초여름 비에, 우수수 감꽃이 떨어진다. 감꽃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너른 감잎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감꽃이 땅에 뒹굴어야 그제서야 반가운 감꽃이 되었다.

아이들은 감꽃 목걸이로 감꽃을 세면서 놀았다. 감꽃으로 빠꼼살이(소꿉놀이)도 하고 큰 아이들은 꼴망태기와 감꽃 목걸이를 주렁주렁 목에 걸고서는 소를 몰고 강가로 나간다. 놀다보면, 꽃상여 타고 동네 어른이 돌아가시던 외나무다리로, 작년 가을 도회지로 가출했던 만섭이 형이 제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고개 하나 못 들고 쭈뼛쭈뼛 거리며 돌아온다. 그 만섭이 형도 감꽃을 우물거리며 맛을 보다가 한 번씩 먼 산을 쳐다보았다.

더러 잠께이뽀(가위바위보)로 은순이 정태, 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몇 녀석이랑 신랑, 각시 정해서 소꿉놀이를 했다. 사기 조각이나 펑퍼짐한 돌멩이에다 감꽃을 얹어 놓고 밥상을 차렸다. 감꽃으로 아침 식사를 끝마치면 이제 풀 줄기를 오므려서 양산을 만들었다. 한 손엔 양산을 받쳐 들고 감꽃 꽃반지에 팔찌, 목걸이를 해서는 손이며 목에다 주렁주렁 걸고 신랑 각시 팔짱끼고 나들이를 나갔다.

감꽃의 꽃말은 "잘 다녀오세요" 라는 걸 그 때서야 몰랐지만 꼭 감꽃 액세서리를 해서 나들이를 갔다 오는 소꿉놀이만은 잊지 않았다. 당초 꽃목걸이는 감나무의 특성 때문에 아들 낳기를 바라는 새색시가 즐겨 걸었다고 한다. 다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동네 어귀에 백년 묵은 감나무에는 천여 개의 감이 열린다고 한다. 감나무는 자손 번창의 뜻으로 자식을 얻는 나무로 인식되고 제사상에 감이나 곶감을 올리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감씨를 심으면 감이 열리지 않고 고욤이 된다. 고욤은 생김새는 감을 닮았지만 크기는 도토리만 하고 떫어서 먹지 못한다. 나중에 3~5년쯤 지나서 줄기를 대각선으로 잘라서 기존의 감나무 줄기에 개량종을 접붙인다. 우리가 먹는 감나무는 모두 이런 식으로 접붙여서 만들어졌다. 줄기에다 접을 붙여야지 가지에 붙이면 한쪽 나무에선 단감이 열리고 한쪽 나무에선 고욤이 열린다.

동네 어른들이 감나무 접을 붙일 때면 꼭 한마디씩 하는 말이 있었다. "남녀가 짝을 맺어야 튼튼한 자식을 놓듯이 이 감나무도 줄기에 붙여야 튼실한 감이 열린다"는 말을 듣곤 했다.

이제 감꽃을 세며 감꽃 액세서리를 만들며 노는 아이들은 없다. 감꽃체험은 감나무가 있는 어는 곳이나 가능하다. 우리 지역의 반시가 나는 청도, 곶감으로 유명한 상주를 찾아도 감꽃 체험이 가능하다. 상주바우농원(http://www.bawoogam.com)이나 청도군의 한재평양농장 등에서 감꽃체험이 가능하다.(http://www.pyfarm.com)

김경호(아이눈체험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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