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친절한 life씨]정상회담 건배주

정상의 자리에 선 사람들이 마시는 술은 어떨까? 특히 오찬이나 만찬을 곁들이는 정상회담에서 어떤 술이 건배주로 선보이느냐가 큰 관심이다. 최근 들어서는 예전처럼 와인이나 위스키만 고집하지 않고 자국 전통주를 쓰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04년 한 '일 정상회담에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자국 민속주인 모리주로 건배를 제의했다. 지난 1972년 미국 닉슨과 중국 마오쩌둥 간 정상회담 만찬주로는 마오타이가 나왔다. 이 밖에 소련에서는 보드카, 멕시코에서는 데킬라의 일종인 메스칼, 노르웨이에서는 벌꿀술인 미드가 정상회담의 만찬주로 등장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2년 열린 아셈(ASEM)회의에서 건배주로 금산 인삼주, 후식주로 고창 선운산 복분자주가 채택됐다.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평양 모란관에서 남쪽이 베푼 만찬의 건배주로 문배주가 쓰였다. 또 지난 2005년 APEC 만찬에서 건배주로 부산에서 생산되는 향토술 '천년약속'이, 후식주로는 보해가 만드는 '복분자주'가 쓰였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도 천년약속과 복분자주 등 국내 명주들이 건배주와 만찬주로 낙점받았다.

◇ 2007년 남북정상회담

천년약속은 만찬에 앞서 노 대통령을 비롯한 남'북측 인사 모두가 건배할 때 사용했다. 천년약속은 멥쌀로 빚은 알코올 함량 12% 짜리 '천년약속 프라임'과 찹쌀로 빚은 알코올 16% 짜리 '천년약속 일품'이 있다. 누룩이나 효모를 사용하지 않고 상황버섯 균사체만으로 쌀을 발효시켜 알코올을 생성하는 특허기술로 빚었다. APEC 건배주로 선정되면서 관심을 끈 천년약속은 이후 국가올림픽위원회총연합회(ANOC), 세계장애인역도대회, 제14차 국제노동기구(ILO) 아태 총회, 한일관광 교류의 밤, 한일정상회담, 제15차 세계한상대회 등에서 건배주로 사용되면서 이름을 날렸다.

만찬 중 제공되는 식사주에는 '백세주'와 '보해 복분자'가 쓰였다. 보해 복분자는 APEC 정상회담에 이어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공식 만찬주로 사용된 명주. 한'중 수교 15주년과 '한'중 교류의 해'를 맞아 지난 4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식탁에 공식 만찬주로 올랐다. 이 술은 노벨평화상 수상자 광주정상회의, 6.15민족통일 대축전 등 국내외 주요 행사에 만찬주로 잇따라 얼굴을 내밀었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건배했던 술은 들쭉술. (주)백두산들쭉술에서 출품한 이 술은 해발 800m부터 2200m 사이 백두산 고산 지대에서 자생하는 무공해 들쭉을 원료로 만든다. 1961년부터 혜산 들쭉 가공 공장(양강도 혜산시)에서 생산하는 북한의 명주다.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이 산간벽지 공장을 두 번이나 방문해 생산을 격려했으며 평생을 복용했다는 유명한 술이다. 김 주석은 공장 방문 당시, 프랑스의 코냑,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같은 세계적 명주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문배주는 남측이 대표 술로 내놓아 유명해졌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6-가호.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문배술의 향에 반했다는 후문이 전해져 더욱 유명세를 탔다. 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 전수되어 온 문배술은 능금나무과의 문배나무에서 피는 문배꽃의 향을 담아냈다해서 문배술이란 이름을 가지게 됐다. 마시고 난 뒤에도 진하게 남는 향을 가진 것이 큰 특징으로, 40도의 알콜 도수로 영구저장이 가능한 술이다. 본래 평양지역의 전통주이던 문배술은 남쪽에 자리 잡아 1954년 거북선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하다 정부의 양곡관리법에 의해생산이 중단되는 등 갖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정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2000년 회담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친 술은 '샤토 라투르'. 남북 공동선언 서명이 끝난 뒤 건배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내놓은 세계적인 와인. 당시 이 와인을 단숨에 비운 김 위원장의 술 실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건배주는 샤토 라투르 1993년산. 지난 추석 유명 백화점이 판매한 샤토 라투르 선물세트 가격은 무려 770만 원이었다. 프랑스 와인인 샤토 라투르는 보르도 메도크 지방의 5개 1등급 와인 중 하나로 최고의 레드 와인으로 꼽힌다. 외신에 따르면, 와인 마니아인 김 위원장은 개인 저장고에 1만 병을 쌓아놓고 있으며, 취임 당시 프랑스 와인 6만6천여 병을 주문해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지난 1월 병당 1천 달러를 호가하는 샤토 라투르 1982년산을 전국경제인연합회 만찬에서 선물로 내놓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한국 대통령들의 백악관 만찬

백악관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들은 어떤 술을 대접받았을까? 1995년 7월 백악관을 공식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식사 동안 제공된 알코올 음료는 크게 3가지. 우선 캘리포니아주의 캔달 잭슨에서 만들어진 1993년산 화이트 와인인 비온에이(Viognier)가 있다. 가격은 40달러 정도. 레드 와인으로는 캘리포니아 키스트렐에서 생산된 1992년산 쿠베 캐서린(Cuvee Catherine)이 제공됐다. 당시 가격은 알 수 없지만 현재 희귀 와인으로 최하 150달러에 팔리는 고가 와인이다.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나파계곡에서 만든 샴페인인 브랑크 드 노이르(Blanc de Noirs)가 건배용으로 제공됐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20달러 정도에 팔리고 있다.

1998년 6월 백악관에서 이뤄진 김대중 대통령의 환영만찬에서도 3가지 알코올 음료가 제공됐다. 화이트 와인으로는 캘리포니아 나파 계곡에 있는 샤퍼에서 만든 1996년산 레드 숄더(Red Shoulder). 현재 55달러 정도에 판매된다고. 레드 와인은 오리건주의 렉스 힐(Rex Hill)에서 만든 피노노와르 1994년 리저브가 나왔다. 오리건주는 캘리포니아주에 이어 고급 와인이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특히 렉스 힐의 와인은 고급으로 유명하다. 피노노와르 리저브는 현재 150달러 선에서 거래되는 고급 제품. 건배를 위해 사용된 샴페인은 캘리포니아의 에르미타제 로에델러(L'Ermitage Roederer)가 만든 1991년산 쿠베다. 50달러에 거래되는 비교적 고급 제품.

◇ 에피소드

지난 4월 심장질환으로 숨진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나쁜 술버릇'이 재임 당시 자주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 1994년 9월 미'러 정상회담을 마치고 아일랜드 샤논 공항에서 앨버트 레널즈 아일랜드 총리와 공항회담을 가질 예정이던 옐친은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70여분간을 머물다 러시아로 돌아가 버렸다. 옐친을 기다리던 총리 부부와 수십명의 양국 고위 관리, 의장대는 허탈할 수 밖에 없는 노릇. 레널즈 총리는 소스코베츠 러시아 제1부총리와 30분간 회담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런 해프닝에 대해 옐친 대통령측은 처음에는 "피곤에서 온 건강상 문제"라고 설명했다가 이후 "깊은 잠에 빠져서"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정상간의 건배주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얼마 전 미국 방문 당시 건배사를 통해 재치를 발휘했다. 전날 백악관 공식 환영회에서 부시 대통령의 말 실수를 가볍게 꼬집은 것. 전날 부시 대통령은 환영사에서 과거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미 연도를 미국 독립선언 200주년인 1976년이 아니라 1776년이라고 잘못 언급했었다. 이튿날 저명인사 100여명이 초대된 자리에서 여왕은 '내가 지난 1776년에 워싱턴에 방문했을 때'라는 말로 건배사를 시작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던졌고, 이 말에 부시는 잔을 들고 "폐하,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라며 답했다고. 이후 좌중은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건배주라고 해서 반드시 알코올 음료가 쓰이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05년 APEC 정상회담 당시 술을 안마시는 부시 미국 대통령은 주스로 건배를 했다. 공식 만찬때 건배하면서 화이트 와인을 애플주스로, 레드 와인을 크랜베리주스로 대체해 즐겼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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