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7 독자농촌체험] (17)구미 장천 머들마을

풍요로운 가을 들녘은 마음마저 넉넉하게 한다. 아직은 초록빛이 드문드문 남아있지만 수줍게 고개 숙인 벼들은 농부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도 환한 미소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지나온 여름의 굵은 빗줄기와 세찬 태풍을 이겨낸 녀석들이 기특하기만 하다.

"어서 오이소. 저희 마을은 마을 앞 논과 밭의 흙 빛깔이 검고 기름져 머들마을이라고 부른답니다. 말없이 순박하게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는 인심 좋은 마을이란 뜻으로 묵어리라고도 한답니다."

대대로 고향을 지켜오고 있다는 박동환 이장의 마을 소개에 이어 모두 마을 뒷산, 달불산에 오른다. 묵을 만들기 위해 도토리를 주우러 가는 길이다. 곧이어 산 속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의 환호성이 쏟아진다. "엄마, 저 벌써 20개나 주웠어요. 진짜 많죠?" "그렇구나, 그런데 너 이건 뭔지 아니? 영지버섯이란다. 아빠에게 자랑하자꾸나."

트럭 짐칸에 올라타고 메뚜기를 잡으러 들판으로 가는 동안 가을바람에 가슴 속까지 후련해진다. 실개천에 피어있는 갈대밭에서는 절로 시상이 떠오른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어른들이 더 신이 났다. "여보, 우리도 시골에 와서 살까?"

마을회관 앞에는 어르신들이 대나무 활 만들기 체험 준비를 마쳐놓았다. 긴 대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휘어서 시위를 묶으면 그만이지만 컴퓨터게임에만 익숙한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잇감이다. 하지만 화살은 마음먹은 대로 날아가지 않고 애만 태운다. "아빠 어릴 때 활 잘 쏘셨어요?" "그럼, 아빠도 너만 할 때 많이 했었지. 아빠 별명이 주몽이었다니깐." "피, 거짓말."

새끼꼬기 체험에 이어 캠프파이어가 시작되고 모두들 모닥불 곁으로 모여든다. 아이들의 노래자랑에 마을 어르신들도 연방 즐거운 표정이다. "요 근래에 이렇게 많은 꼬마들을 보기는 처음인 것 같네. 자주들 놀러와." 맛있게 익은 군고구마와 막걸리 한잔에 정이 새록새록 쌓인다.

이튿날 아침, 낫을 들고 벼를 베러 나선다. 고사리손들이지만 열심히들 낫질을 한다. "할아버지, 옛날에는 이 넓은 논을 전부 손으로 수확했나요?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 요즘에는 기계로 하지만 예전에는 사람이 다 했단다. 그러니깐 밥 먹을 때 남기면 안 되겠지?"

마을회관 앞마당에서는 도리깨 타작이 이어진다. 도리깨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먼지가 풀썩풀썩 인다. 하지만 아랑곳없다. 진한 들깨 냄새가 구수하기만 하다. 옛 모습 그대로인 정미소에서는 모두들 눈동자가 반짝인다. 벼가 쌀이 되어나오는 과정이 신기하기만 하다. 갓 찧은 쌀이 대도시 대형 마트에 비해 20%나 저렴한 까닭에 저마다 지갑을 열고 한 포대씩 안아든다. "저희 동네에서는 밥맛 좋기로 유명한 일품 품종을 주로 재배하는데 드셔보시면 정말 맛있을 겁니다."

어제 저녁 만든 묵밥을 먹고 대구로 돌아오는 길, 체험객들의 마음은 이미 농부가 다 된 듯하다. "여보, 추수 마칠 때까지 비가 안 와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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