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 한잔의 단상] 사상누각

수마의 습격으로 들판 전체가 모래사장으로 변해버린 남한강 하구, 한 포병부대가 훈련을 나옵니다. 일사 분란한 움직임, 순식간에 진영의 한복판에 대대장 막사가 솟아납니다. 그 좌우로 본부포대장 막사를 비롯하여 찰리, 알파포대장 막사가 자리 잡고, 올망졸망 사병들의 숙소가 연립주택처럼 지어집니다. 드디어 본대가 들어옵니다. 포차에 매달린 105미리 곡사포, 한국지형에 적합하다는 이유 때문에 살아남은 구닥다리지만 포신 번쩍이는 수십 문의 대포가 진열되자 그 위용은 장관입니다.

진영이 갖추어집니다. 마지막 남은 가장 중요한 작업은 화장실입니다. 소녀가 앉았다 일어나면 꽃이 핀다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군대가 머물다 간 자리는 전략상 변 지뢰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민원이 속출하고 가끔씩 대대장의 멱살을 잡는 주민도 생깁니다.

군 생활에 녹슬어 삐걱거리는 머리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습니다. 제법 근사한 접이식 이동화장실이 고안됩니다. 직사각형 칸막이를 여러 개 연결하여 병풍처럼 만들고, 앞뒤로 접을 수 있게 장석 대신에 타이어고무를 댑니다. 凹자 형태로 접어 세우고 각 칸마다 구덩이를 파고 널빤지 두 개를 걸쳐놓으면 됩니다.

작전을 개시합니다. 문짝을 만드는 조와 측량하여 구덩이를 파는 조로 나눕니다. 문짝 만드는 일도 그렇지만 겨울 땅 파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2월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도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달명령 필사완수, 순식간에 아홉 칸의 일반실과 한 칸의 특실이 만들어집니다. 임무 완수. 대대장의 작전개시 명령이 하달되고 몸소 적진으로 돌격합니다. 이상 무!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부대원들의 함성이 터지고 화장실은 금방 만원이 됩니다.

작전 이틀째 아침, 서리로 새하얀 들판을 응시하며 3호실에 앉습니다. 얼지 않은 강어귀에서 안개가 피어 몽실 거립니다. 강 건너 민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승천합니다. 마치 무릉도원에 든 듯한 무아지경, 작전 중이라는 현실과 3호실이란 특수공간을 잊고 풍경화 속의 주인공이 됩니다.

비몽사몽 환상과 몽상이 아우러지는 순간, 지반이 요동치면서 몸 전체가 기울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착각인지 실제인지 구분되니 않는 상황, 1호실 쪽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집니다. 으악~, 철퍼덕~

겨우내 얼었던 모래지반이 배설물의 열기와 물기에 녹아 허물어진 것입니다. 1호실에서 시작된 도미노는 순식간에 10호실까지 덮칩니다. 엉망진창 변탕, 웃음범벅으로 아수라장이 됩니다. 얼음 깬 물로 몸을 씻는 스님을 고승이라 추앙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천리향보다 진한 향기가 그 해 겨울 내내 웃음으로 남았습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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