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금이정의 독서일기]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 박병상

"올핸 참 이상해. 호박꽃에 꽃가루가 없더라고. 꽃은 많이 피었는데 겨우 애호박 두 개 밖에 따지 못했어." 밭에 호박을 심었다가 낭패를 보았다는 어느 분의 말씀이다. 초롱심지 같은 꽃술마다 노란 꽃가루가 듬뿍 묻어 있어 꿀벌들이 유난히 잉잉거리며 달려들던 호박꽃 아닌가. 그래서 내가 "혹시 벌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라고 했더니 그 분은 단호하게 "아니다"고 하셨다. 호박이 열리지 않아서 인공수정이라도 해 주려고 꽃을 열어보니 꽃마다 하나같이 꽃가루가 묻어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하긴 꽃에 화분(花粉)이 없는데 벌이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일까.

지구의 '6 번째 생물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다는 유엔 환경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주위를 살펴보면 수상쩍은 현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꿀을 따러나간 일벌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무더기로 실종되는 사건도 심상치 않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꿀벌의 70퍼센트 이상이 그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유전자변형 식물. 농약. 휴대전화의 전자파 등에 혐의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그 정확한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라던 아인슈타인의 말을 떠올리면 왠지 섬칫하다.

이 책은 산. 들. 강. 바다. 하늘에 사는 우리 동물들의 이름을 정답게 호명해준다. 마치 사라져 가는 고향의 기억처럼 이들도 어쩌면 가까운 장래에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행간마다 배어 있는 듯하다. 저자가 굳이 책제목을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라고 정한 것은 이것이 곧 우리 곁에서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될 수도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이 땅에서 오랜 세월을 우리 인간과 함께 해왔던 생명들. 이 참에 그 이름들을 한번 불러보자. 비오리. 밍크고래. 직박구리. 꼬리치레도룡뇽. 붉은머리오목눈이. 배추흰나비. 도요새. 호랑이. 고니. 살모사. 쉬리. 아무르장지뱀. 방울새. 삵. (이땅에서 50년을 산)황소개구리. 굴뚝새. 가마우지. 백합. 동박새. 밴댕이. 감돌고기. 점박이물범. 버들가지. 재첩. 황복. 짱뚱어. 늑대. 산양. 수달. 저어새. 두루미. 황새. 금개구리. 원앙. 매. 톡토기. 종어. 송사리. 비둘기. 각시붕어. 두꺼비. 참새. 청개구리. 청설모. 제비. 생쥐. 까치. 메뚜기. 꿀벌. 멧돼지. 다람쥐. 조기.......

모두 지구 가족의 당당한 일원들이다. 이 동물들이 우리 곁에 얼마나 더 오래 머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불안한 터전에서 분명 위태로운 '생명의 목록'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지구 생태계가 40퍼센트도 채 남지 않았다 해도 세상은 너무나 태연하고 무심하다. 지구 온난화의 주원인인 '경제성장'을 그만두자는 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자연재앙은 그 누구라도, 그 어떤 첨단 문명이라도 비켜가지 않을 텐데.

생명의 그물코 하나가 훼손되면 그 이웃 그물코가 풀어지고 결국은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하루 빨리 풀어지고 훼손된 그물코를 깁지 않으면 안 된다. 혁신적인 대안과 전 인류의 결집된 실천이 무엇보다 시급한 때이다. 인드라망처럼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자연이 머잖아 그것을 우리에게 되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호박을 달지 못하는 호박꽃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꿀벌이 이미 그 불길한 징조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bipas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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