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성도의 오페라 이야기] ④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1850~1905)

타마뇨 하면 우선 천둥소리 같은 우렁찬 테너가 연상된다. 드라마틱을 넘어 최강의 로부스토 음역을 가졌다. 그에 대한 찬사로는 베르디 '오텔로' 전문 테너, 하이 C 샤프까지 쉽게 도달하는 가수, 카루소의 대선배 등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그는 투린의 가난한 여관지기 아들로 태어났으나 긍지를 갖고 살았다. 동료들과 다르게 고상한 체면은 추구하지 않았다.

명 소프라노 멜바(1861~1931)의 회상에 따르면, 하루는 같이 식사하고 남은 음식을 개 준다고 종이백에 담아 갔는데 다음날 우연히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딸과 같이 가져 간 음식을 먹고 있더란 것이었다. 그의 경력은 투린의 합창단에서 시작된다.

1874년 팔라르모에서 '가면무도회'의 리카르도 역으로 데뷔했다. 그 후 예술적 완성도를 얻을 겨를이 없도록 많은 계약이 들어왔다. 1877년 라 스칼라에서 '아프리카나'와 고메즈의 '포스카'를 불렀다. 모두 인상적인 연주였지만 그의 노래는 훈련 부족이고 연기도 미숙하다는 평을 들었다.

점차 훈련을 거듭, 그 다음 시즌엔 '돈 카를로'만 43회 불렀다. 1879년 남미 여행 후 다시 라 스칼라로 돌아와 폰키엘리의 '필리올 포르디고', 베르디의 '에르나니' '시몬 보카그네라'를 했다. 남미에서는 1회 출연료가 2천250달러였다. 그러나 돈을 아끼려고 항해 때는 조타석 옆 골방에서 잤다.

1887년 베르디와 보이토가 그를 라 스칼라에 초청, '오텔로' 첫 주역을 맡긴 후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달한다. 그의 공연은 오페라 그 자체를 뛰어넘는 열광적 인기를 누렸다. 가극장마다 그가 공연하는 오페라와 함께 그를 유치하려 했다. 그는 로마·나폴리·베니스·부에노스 아이레스·런던과 뉴욕을 오갔다. 런던 리세움 가극장 공연시에는 코벤트 가든이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오텔로'를 듣고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소리가 너무 날카로워 심지어 염소가 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베르디조차 타마뇨 기용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가 공연에 성공했음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토스카나니는 덜 유명한 데 네그리(1850~1923)를 선호했다.

타마뇨는 뉴욕 시즌(1890)에서는 9개 오페라를 23회 공연했고, 주로 아놀도, 루돌포, 에드가르도, 만리코, 오텔로, 투리두, 바스코 등을 공연했다. 1897년 파리에서 401번째 오텔로를 불렀다. 몬테 카를로에서 1회 출연료가 5천 달러에 달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공연 횟수를 줄여야 했지만, 1902년까지는 노래를 불렀다. 1903년 아르헨티나에서 마지막으로 '오텔로'를 불렀다. 그의 첫 녹음은 건강 때문에 그의 별장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나이 52세였고 무리한 연주 일정,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음성은 빛이 나고 힘이 있었다.

비평가 쇼는 녹음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있지만 그의 '오텔로'의 고음역은 경이롭다. 그 후 '오텔로'를 부른 가수는 카루소, 도밍고, 마르티넬리, 델 모나코, 파바로티, 빅커즈, 비나이 등이 유명하다. 1905년 8월 31일 바레세에서 타계했다. 윤 성 도(시인·계명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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