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글로벌 대경인] ①在佛 화가 남홍

▲ 남홍 화백은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정신이야말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 남홍 화백은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정신이야말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지난해 파리에서 열린 자신의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초대전 포스터 앞에서 서 있는 남홍 화백. 남홍 화백 제공.
지난해 파리에서 열린 자신의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초대전 포스터 앞에서 서 있는 남홍 화백. 남홍 화백 제공.

'세계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 퓰리처상을 세번이나 수상한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만의 저서 제목이다. 물론 지구가 둥글지 않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편 것은 아니다. 정보화로 국가간의 물리적 공간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21세기에 대한 비유다. 그의 말대로 '평평해진 세상'에서 국적이나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정신과 노력만 있다면 지구촌 어디에 있든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지역의 틀을 넘어 세계인으로 뛰고 있는 '글로벌 대경인'들을 만나보자.

"아이고, 진짜 이까지 오셨네. 마이 피곤하지예? 시차적응도 아직 안 될낀데…."

TV에서 흘러나오는 파트리샤 카스의 샹송만 아니었다면 금호강이 바라보이는 대구시내 어디쯤으로 착각할 뻔했다. 프랑스에 온 지 벌써 30년이 다 돼 가지만, 창 너머 세느강이 훤히 보이는 파리 자택에서 만난 남홍(52·여·본명 이남홍) 화백의 사투리는 투박한 대구사람 그대로였다.

불 탄 한지를 콜라주(Collage·풀로 붙인다는 뜻으로 근대미술의 기법)하거나 캔버스를 촛불로 그을리는 독특한 퍼포먼스로 '불과 재의 시인'으로 불리는 남 화백은 1979년 옛 효성여대(현재 대구가톨릭대)를 졸업한 뒤 1982년 프랑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서였다.

도불(渡佛) 이듬해, 국제적 권위를 자랑하는 '르 살롱'(Le Salon)과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 전시회에 잇따라 입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화려하게 알렸지만 그는 이때까지 정식으로 미술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대학 전공도 불문학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은 제게 숨쉬는 것과 같았죠. 초등학교 다닐 때는 노트에 그림만 잔뜩 그렸다가 선생님에게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대학 입학때까지만 해도 전업화가의 길을 걷겠다는 생각은 안 했죠. 제대로 된 공부는 파리8대학에서 처음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화가는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는지 모르겠다. 8남매 가운데 6명이 미술과 인연을 맺고 있는 집안 내력으로 미뤄보면 그렇다. 큰오빠는 취미로 한국화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고, 서울대 미대를 나온 작은오빠는 서양화가 이강소 화백이다. 역시 서울대 미대를 나온 큰언니 이강자(2002년 작고)씨는 조각가였고 둘째언니 이순자씨는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대학 강단에 서 있다. 넷째 언니 이현주씨 또한 재미 서양화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향을 자연스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의 길을 걷진 않으셨지만 모두들 그림이 취미이셨으니까요."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일까. 남 화백의 슬하에서도 조만간 화가가 나올 것 같다. "아들 셋 중 쌍둥이인 막내(12)가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벌써 엄마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하하하."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인 '죽음에 대한 성찰'도 남달리 애틋했던 가족관계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절 무척 귀여워해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진 평범하게 추상화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생전에 대보름날 한지를 태우면서 가족의 행복을 빌던 모습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아 캔버스에 옮겨봤죠.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을 한국적 정서로 풀어낸 게 파리에서 통한 것이지요."

파리 교외에 있는 아틀리에로 자리를 옮겼다. 파리 북쪽으로 30km쯤 떨어진 그의 작업실은 '반 고흐 예술인촌'에 있다. 고흐의 무덤이 있기도 한 이곳은 프랑스 정부가 러시아, 포르투갈, 스페인, 중국 등 세계 각국 출신의 예술가 20여명을 초청해 문화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유일한 한국인인 남 화백은 1998년 입주했다.

그는 사실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2002년에는 프랑스문화협회 황금캔버스상, 유럽아트페어 관중상을 수상했고 2004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오베흐성에서 개최한 '문화재의 날' 행사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2006년, 2007년에는 연속으로 파리16구청 초청 초대작가전의 영광을 안았고 2005년에는 프랑스 미술전문지 '위니베르 데자르'(Univers des Arts)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어쩌면 한국에서 미대를 다니지 않았던 게 더 도움이 된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분방한 창의력으로 평가받는 게 이곳 화단의 분위기이니까요."

획일화, 도식화를 거부하는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기 살롱전 입상 작가들의 프로필을 보면 '언제 결혼했다' '애는 언제 낳았다'는 얘기만 써놓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100% 아마추어들도 자신의 노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것이죠. 한국에서야 생각조차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저도 한국에 있었더라면 명성은커녕 주부 취미화가로만 남았겠죠. 프로필에만 현혹되지 말고 1분이라도 더 그림을 느끼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뻬르포르만스'(퍼포먼스)도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한국적인 그 무엇'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20년 전에는 그저 붉은 장미잎으로 뒤덮인 하얀 광목을 찢는 것만으로도 각광을 받았지만 이제는 장구춤·승무·살풀이춤까지 등장한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배울 게 많다고 했다. "가야금을 배워 공연에 활용할 생각이에요. 아이들 교과서에 가야금이 일본 악기로 소개돼 있는 게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죠. 사실 제가 처음 왔을 때나 지금이나 한국에 대해 아는 프랑스인은 별로 없어요."

쉰이 넘은 나이에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부러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되돌아온다. "전 요즘도 밤샘작업을 할 때가 많아요. 애들 키우느라 낮에는 시간이 없거든요. 요즘은 그렇게까지 못 하지만 예전에는 사흘씩 밤샜어요." 검도 4단, 유도 2단의 체력도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밑받침이란 설명이었다.

"인생은 책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에 계속 머물 수 없죠. 힘들어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전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그동안 퍼덕여온 날갯짓이 피곤하지만 더 나은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 예정된 미국 소더비 경매를 계기로 미국 진출을 고민하고 있다는 그는 "한국이 요즘 어렵다지만 두려움을 갖지 말고 새로운 환경과 맞설 수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어릴 적 놀러갔던 팔공산과 낙동강 풍경이 아직도 자주 생각난다는 그는 영원히 대구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1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가도 고향에 왔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대구까지 와야 정말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집니다. 2007년 대구전시회때 와주신 많은 분들의 격려는 제 창작활동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대구시민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프랑스 파리에서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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